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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와 신 상 담
  • 구분고전명구(형옥야화/고사성어)(저자 : 홍혁기)
  • 등록일 2009-01-01
  • 조회수 1,682
  • 담당 부서 대변인실
臥 薪 嘗 膽 洪奕基 周敬王 24년(B.C. 496)은 吳王 闔廬(합려)의 19년이다. 이해 여름, 오나라는 越나라를 침공했다. 두나라는 先王 때부터 원수사이였다. 越王 句踐은 추리란 곳에서 오군을 맞아 싸워 姑蘇에서 오군을 대패시켰고, 오왕 합려에게 발을 부상시켰다. 오왕 합려는 이 상처를 치료하다 죽게되자 태자 夫差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너는 句踐이 네 아비를 죽인 사실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숨을 거두었다. 새로 오왕이 된 부차는 대부 백비를 太宰로 임명하여 精兵을 기르고 식량을 비축하는 등 오직 父王의 한을 풀기 위한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몸소 섶에 누워(臥薪) 잠을 잤으며, 움직일 때에는 언제나 近侍를 시켜 "夫差는, 越人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잠시도 안락이나 나태에 빠져서는 아니되며 어려운 국민을 돕고 어루만져 온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각오였다. 夫差 2년,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이러한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내고, 그 힘이 길러지기 전에 선수를 써야 한다 하고 모사 범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왕 부차는 정병을 총동원하여 越軍에 대항하여 싸웠다. 월군이 비록 忠勇은 했지만 복수심에 불붙은 오군을 패퇴시키지 못했다. 도리어 패배를 당해야 했다. 오군은 夫椒에서 월군을 크게 꺾고 前王 합려의 '姑蘇의 敗北"를 설욕했다. 월왕 구천은 패군 5천을 이끌고 會稽山으로 몸을 피했으나 끝내 오군에게 포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구천은 大夫種을 오군에 보내어 강화를 요청했으나 거절되었다. 구천은 다시 대부종에게 많은 금은 보화를 들려 吳의 태재 백비를 찾게하여 居中役割을 요청하고, 오왕에게 句踐은 신하가 되고 그 부인은 妾이 되겠으니 강화를 수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왕 부차는 대부종의 애절한 호소에 마음이 움직였고, 또 태재 백비의 助言에 따라 월의 요청을 수락할 의사를 가졌다. 吳子胥(이름 員, 3월 31일자 항 참조)가 간하여 "이 기회에 越을 멸망시켜야 합니다. 구천은 슬기로운 임금이요, 大夫種과 범려는 유능한 신하입니다. 또한 이들은 능히 어려움을 참고 견딜 인물입니다. 만약 이들이 살아서 월나라로 돌아 간다면 반드시 난을 일으켜 오나라는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태재 백비의 요청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조약을 맺고 그들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왕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가자 유능한 人士를 널리 구하여 맞아들였으며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을 어루만져 주었고, 국민과 苦樂을 같이하며 몸소 밭갈이하고 부인은 베를 짰다. 고기와 비단을 멀리하였으며 소·돼지의 쓸개를 방에 걸어놓고 수시로 맛을 보며(嘗膽) "너는 會稽山의 수치를 잊었느냐 !"하며 마치 오왕 부차가 그러했듯 오나라에 보복할 기회만을 노렸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臣服시키자 여유가 생겼다. 酒色을 즐기고 천하의 制覇를 꿈꾸었다. 薺나라와 晋나라를 무모하게 침략하여 소득없이 국력을 소모했다. 吳子胥가 "구천은 실력을 기르며 오나라의 虛를 노리고 있습니다. 齊와 晋은 吳의 발가락에 불과하나 越은 오의 심장입니다. 이곳에 이상이 생기면 오나라는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구천에게 눈을 돌리십시요"하고 간하였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태제 백비의 이간으로 오자서를 멀리하고 그 간언을 듣지 아니했다. 오자서는 吳의 장래가 암담하다고 생각했다. 齊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곳에 아들의 장래를 부탁하고 돌아왔다. 이 사실이 오왕에게 알려져 크게 노여움을 샀다. 오왕 부차는 佩劍을 오자서에게 보냈다. 오자서는 칼을 받고 씁쓸히 웃으며 "내 제아비(闔廬)를 도와 오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는데 도리어 그 자식에게 죽는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 안되어 越이 吳를 짓밟아 멸망시킬 것이다. 내가 죽거든 내 눈을 東門에 달아놓아 句踐이 입성하는 것을 똑똑히 보게하라" 하고 그 칼로 자살하였다. 오왕은 오자서가 죽자 말가죽에 싸아 강물에 던졌다. 周敬王 38년, 오왕 부차는 杞의 黃池로 나아가 諸侯들과 會盟을 가졌다. 오나라는 태자 友가 지키고 있었다. 월왕 구천은 이를 기회로 10년을 하루같이 벼르던 복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태자 友를 죽였다. 구천은 4년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여 笠澤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고 그 2 년 뒤, 吳의 수도 姑蘇(蘇州)로 진격해 들어갔다. 오왕 夫差는 勢窮力盡하여 句踐에게 강화를 요청했으나 구천은 거절하고 降伏만을 요구했다. 夫差는 탄식하고 "나는 늙어 君主를 섬길 수 없다"하고 자살하며 "내 얼굴을 가려라. 나는 낯이 없어 吳子胥를 대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오의 태제 백비는 "뇌물에 탐하여 나라를 팔은 자"라고 하여 목을 베었으며, 吳나라를 대신하여 覇權을 잡고 천하를 호령하였다. 夫差의 "섶에 눕다"와 句踐의 "쓸개를 맛 보다"를 합하여 臥薪嘗膽이란 글자가 이루어진 것으로, 골수에 사무친 복수심을 자나 깨나 되새긴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十八史略一吳. 史記 越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