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법제
- 구분입법자료(저자 : 이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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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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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149
大韓帝國의 法制
李 相 暉
+---------------------------( 目 次 )----------------------------+
| 序 2. 議政府·內閣 |
| Ⅰ. 改革의 歷史的 背景 3. 中樞院 |
| 1. 丙子修好條約 4. 補助機關 |
| 2. 甲申政變 Ⅳ. 法令의 制定節次 |
| 3. 甲午更張 1. 槪說 |
| 4. 大韓帝國의 成立 2. 議政府·內閣 |
| Ⅱ. 近代法體制의 導入 3. 中樞院 |
| Ⅲ. 立法機關 4. 命令등의 制定節次 |
| 1. 軍國機務處 5. 法令의 公布節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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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곧 발간될 「法制處史」의 부록편 자료를 쓰기 위하여 작성된 「前朝의 法制史」중의 일부이다.
「법제」誌 통권 52호에 게재된 「조선조의 법제사」에 이어 계속되는 이 자료는 「대학제국」편에 해당되는데 앞으로 원고가 정리 되는대로 「일제」와 「미군정」편을 게재할 예정이다. 내용의 오류나 불충분한 점을 지적해 주시면 「법제처사」 발간에 큰 도움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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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大韓帝國은 조선왕조를 기준으로 보면 몰락해 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라를 개방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던 시기를 한데 묶어 大韓帝國으로 시대를 구분한다면 이 시대야 말로 우리역사상 가장큰 변혁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하나의 독립된 章으로 부각시켜, 이 개화기 시련기의 법령은 어떻게 제정되고 시행되었는지를 살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개혁의 배경부터 一瞥하기로 한다.
Ⅰ. 改革의 歷史的 背景
1. 丙子修好條約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富國强兵을 성취한 일본은 미국 태평양함대의 무력시위하에 개국을 강요당했던 경험 그대로를 조선에 역용하여 왔다.
1875년에 있었던 强化砲台와 日艦 雲揚號의 발포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무력시위하에 開港을 골자로 하는 修好條約의 체결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마침 大院君의 하야로 鎖國의 결의가 흐려있던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1876년 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하고 부산, 인천, 원산의 3개항을 개항하였다.
開化指向의 첫계기가된 이 조약은 우리의 불운한 근대사 형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修信使 일행이 일본에 건너가 교육·군사·산업시설을 시찰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구의 문물에 눈을 뜨게된 朝廷은 1881년에 紳士遊覽團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찰단을 일본에 보내는가 하면 60여명의 학도를 청국에 보내어 신무기의 제조 및 조련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한편 정부조직에도 대혁신을 단행·청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總理機務衙門이란 새기구를 설치, 軍國의 機務(군무와 국정의 중요사무)를 총리하게하고 그 장관을 總理大臣이라 하였다. 문호개방에 따른 복잡한 內外政事를 구태의연한 종래의 정부조직으로는 처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2. 甲申政變
朝廷의 개혁정책에는 적지않은 저항이 따랐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새 軍制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의 폭동으로 나타났다.
1882년에 일어난 이 壬午軍亂은 淸兵을 서울에 불러들여 결국은 청국의 간섭을 받게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청국의 내정간섭에 불만을 품은 일부 개화세력은 일본의 明治維新을 모델로 일본에 의존하여 개혁을 단행하려는 모의를 꾸몄다.
1884년 우정국낙성식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은 日軍이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국왕의 승인을 얻어 개화내각을 조직 발표하고 革新令을 기초하는등 개혁에 착수하였다.
改革指向의 제2계기로 간주되는 이 갑신정변은 조선조 5백년의 봉건적 전제체제를 근대적 정치체제로 변혁시키는듯 했으나 淸軍의 반격으로 이들 급진 개혁파의 꿈은 三日天下로 끝나고 퇴각하는 일본공사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淸日兩軍의 충돌사건은 양국이 同時撤兵한다는 天津條約(1885년)의 체결로 마무리 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조선에는 外軍이 없는 이른바 太平十年을 맞게 되었다.
3. 甲午更張
掃破倭洋 爲國盡忠을 슬로건으로 하는 東學革命軍(1894년)을 外軍보다도 더 무서워한 조정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고 청국은 天津條約에 따라 파병사실을 일본에 통보하여 1894년 7월에 청일양군이 각각 조선에 진주해 왔다.
外軍의 간섭으로 반란을 진압한 조선정부는 청일양국에 撤兵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국은 동의하였으나 일본은 撤軍을 거부하면서 청일양국이 공동하여 조선의 內政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개혁없는 철군은 再派兵의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었다.
이러한 명분을 내세운 일본은 1894년 7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내세워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청국과의 모든 조약을 폐기하게 하는 한편 개혁안을 제시, 개혁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격분한 청국은 병력을 증파하게 되고 牙山灣에서의 첫충돌이 도화선이 되어 淸日戰爭(1894년 8월 1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성립한 대원군 섭정하의 친일내각은 日本公使 大鳥의 조종하에 개혁을 위한 첫사업으로 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다.
개혁주도기구인 軍國機務處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官制의 개혁이었다. 政府를 議政府와 官內府로 분리시키고 의정부의 영의정을 總理大臣이라 했으며 그 밑에 六曹를 고쳐 八衙門을 두었다.
그밖에도 사회 경제 기타의 여러분야에 걸쳐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는 개혁을 단행했는데 노비제도를 폐지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改革實踐의 제3계기가 된 이 甲午更張은 국민적 각성의 기반이 없는 외세에 의한 개혁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 성취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전쟁에 유리해지자 대원군을 축출하고 더욱 친일적인 내각을 구성하여 내정개혁에 박차를 가했는데 洪範十四條를 제정, 시행토록 한것도 이때의 일이다.
1895년 1월 국왕이 太廟에 誓告하고 선포한 이 洪範十四條는 欽定憲法의 성격을 띤 개혁의지의 명문화인데 그 배후에는 청국의 宗主國的 地位를 부인하고 민비와 대원군을 국정에서 축출하려는 일본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4. 大韓帝國의 成立
청일전쟁은 개전 이듬해에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대만과 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애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下關條約이 체결되었다(1895년).
그러나 일본의 대륙진출을 경계해 오던 露國은 獨·佛과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게 하였다(1895년).
이 3국간섭으로 힘의 경쟁에서 노국이 돋보이게 되자 일본의 개혁압력에 혐오를 느껴오던 조정내부에 親露派가 대두하게 되었다.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이들 친로파는 폐비음모사건을 구실로 친일세력을 축출하고 친로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와같은 정국의 급변을 본 일본공사 三浦는 비상수단을 강구, 무장한 병사를 풀어 경복궁에 난입하여 閔妃를 弑害(1895년 10월)하고 대원군을 다시 추대, 친일내각을 수립하여 개혁정책을 속행해 나갔다. 一世一元(建陽)을 쓰게 하고 단발령을 내린것도 이때의 일이다.
민비시해와 개혁의 강행으로 排日氣運이 높아가고 있는 틈을 타서 노국공사 위벨은 계략을 꾸몄다. 인천에 있는 자국의 水兵을 서울에 불러들여 공사관을 호위하게하는 한편 일본과 대원군이 廢王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속여 국왕의 거처를 俄館으로 옮긴 것이다. (1896년)
이 俄館播遷에 성공한 노국은 친로내각을 구성, 일본인 고문과 무관을 추방하게 하고 단발령 등 개혁조치를 철회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친일정객은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왕의 播遷, 왕비시해사건 등으로 국위가 땅에 떨어지자 이를 개탄한 개화독립운동의 소수 선각 그룹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독립의 선포를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이들 요구를 받아들인 국왕은 1897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그해 8월에는 詔勅을 반포하여 年號를 光武, 國號를 大韓이라 선포했으며 10월 12일에는 皇帝卽位式을 거행하였다.
독립신문이 창간되고 독립문이 건립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러나 自主改革의 마지막 기회로 간주되는 대한제국의 성립은 한갓 허울 뿐이고 내실은 세계열강의 이해가 교차되는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노국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이 한반도에서 맞부딪치게 되었으며 1904년 2월 8일 양국함대의 인천해전을 신호로 노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을 개시한 일본은 「전쟁수행상의 편의 제공」을 골자로 하는 韓日議政書에 강제로 조인하게 하더니 전쟁에 유리해지자 「고문관 파견」을 골자로 하는 韓日協約을 체결하여 顧問政治를 시작했으며 전쟁을 승리로 끝낸 1905년에는 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統監府를 설치 統監政治를 시작하였다.
風前燈火의 國運을 바라보는 황제의 마지막 몸부림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구실로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丁未七條約(1907년)을 체결,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마지막 절차인 韓日合倂條約을 체결하고 總督府를 설치하므로써 大韓帝國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Ⅱ. 近代法體制의 導入
대원군은 섭정에 취임한 이듬해(1864년)에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기구개편을 단행하면서 纂輯所를 설치하여 조선조 마지막 受敎輯인 大典會通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 까지 유지되어 오던 경국대전체제는 이 대전회통을 끝으로 종말을 고하고 갑오경장(1894년)을 기점으로 일본에 의한 근대적 법률체제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년)의 도발구실을 조선왕조의 내정개혁에 두었던 까닭에 승전을 거듭하게 되자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개혁을 강행해 나갔던 것이다.
軍國機務處가 개혁입법을 量産하고 국왕이 洪範十四條를 공포한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조선조의 법률전통에 커다란 변혁이 생기게 되었다.
이 변혁의 요지는 근대적 법률체제의 등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에 나타나기 시작한 근대법적 요소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법치주의의 萌芽라 할 수 있는 법률에 의한 지배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국왕은 政務親裁의 권한이 있는 동시에 法令遵守의 의무도 질것」(1894년 10월 23일자 어전회의에 제시된 일본공사의 제2차 내정개혁안 제2항). 「四民平等의 법을 제정할것」(1894년 11월 11일에 일본공사에게 약속한 五大臣誓言 제6항)등의 요구를 모두 받아드린 국왕은 1894년 12월 12일에 詔勅으로 誓告文(洪範14條)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洪範十四條는 그 자체의 표현대로 「짐 소자가 열네가지 큰 법을 만들어 하늘에 계신 조종의 신령에 맹서」하고 국민앞에 반포한 것이다. 비록 일본의 강권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이 홍범14조는 국왕 스스로가 국민에게 약속한 것으로서 이른바 欽定憲法의 성격을 띤 것이라 하겠다.
이에 의하면 「법령이 정한 세목과 세율이외의 조세는 인민에게 부과하지 않으며」(人民出稅 總由法令定率 不可妄加名目 濫行徵收)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民法刑法 嚴明制定 不可濫行監禁懲罰以保全人民生命財産)고 되어 있다.
또 誓告文을 반포한 다음날에는 칙령제14호로 誓告綸音(국왕의 담화문)을 반포했는데 여기서도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짐이 보호하며 법이 아니면 형벌하지 아니하고 법이 아니면 조세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니 인민의 생명과 재산은 법률에 따라 보호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근대적 법치주의의 맹아를 엿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誓告文과 誓告綸音은 한문체와 함께 순 한글로도 작성하여 반포했는데 이것도 인민을 의식한 근대적 통치이념의 발현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들수 있는 근대법적 요소는 近代的 法律形式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국대전 체제하에서의 법률이란 용어는 條例·條令·敎旨·受敎 등을 범칭한 개념이며 이른바 法段階說的인 헌법의 하위, 명령의 상위규범으로서의 법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같은 근대적 의미의 법률은 갑오경장이후에 등장한 개념인데 이때부터 법규에 형식적 효력을 부여하고 그 법규의 타당성의 근거를 상위 법규에 두도록 하였던 것이다.
1894년 11월 21일 칙령제1호로 제정된 公文式을 보면 「법률과 칙령은 의정부에서 의결한 후 중추원의 자문을 거쳐 上奏하여 聖裁」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제2조).
이에 대하여 「의정부령과 아문령은 총리대신과 각 아문대신이 법률과 칙령의 범위내에서 법률·칙령을 시행하고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발하는 것」(제4조)으로 규정하고 또 「훈령은 법률과 명령의 범위내에서 장관이 그 소관관리에게 훈시 또는 명령하는 것」(閣令等區分規程제2항)으로 규정하여 각각 그 타당성의 근거를 상위법규에 두도록 하고 있다.
또 이때부터 법령에 條文形式을 채택하고 법령에 제몇호 등의 일련번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1894년 6월 26일에 제정된 전문 14조의 군국기무처관제가 조문형식을 채택한 효시이며 1895년 3월 25일에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이 법률제1호이다.
또하나 특기할 것은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부역(附譯)하거나 혼용할 수 있다」(공문식 제14조)고 규정한 사실이다.
경국대전체제하에서의 법령의 공포는 지배의 편법으로 각 官衙에만 통첩하는 片面的公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은 새로운 법령의 존재를 모르고 지내는 것이 상례이었다.
이와같은 전통에서 생각하면 법률의 존재를 국문으로 본을 삼게 한 것은 근대적 법률 사고의 커다란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시기는 법률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법률형식에 있어서도 큰 변혁을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당시에 제정된 관계법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정·개정 연월일 법 령 명 칭
94. 6. 28 議政府官制
94. 7. 12 命令頒布式
94. 7. 14 各府各衙門通行規則
94. 11. 21 公 文 式
95. 3. 25 內 閣 官 制
95. 3. 25 內閣所屬職員官制
95. 3. 25 中樞院官制及事務章程
95. 3. 25 各部官制通則
95. 3. 25 內閣所屬職員分課規程
95. 3. 25 內閣事務辨理規程
95. 3. 25 閣議提出章程
95. 3. 25 請議書調査幷閣議案調製規則
95. 3. 25 閣議決定章程
95. 3. 25 裁可奏請及指令規則
95. 3. 29 公文式(改正)
95. 3. 29 閣令部令訓令告示及指令區分規程
95. 4. 1 各部處務規程通則
95. 4. 2 中樞院會議及處務規程
95. 5. 8 公文式(改正)
96. 9. 24 議政府官制
96. 10. 9 議政府所屬職員官制
96. 10. 15 議政府所屬職員分課規程
98. 6. 18 議政府官制(改正)
98. 11. 2 中樞院官制(改正)
98. 11. 12 中樞院官制(改正)
99. 5. 22 中樞院官制(改正)
99. 6. 7 中樞院議事規則
99. 8. 25 中樞院官制(改正)
04. 3. 4 議政府官制(改正)
05. 2. 26 議政府官制(改正)
05. 2. 26 中樞院官制(改正)
05. 10. 24 議政府官制(改正)
05. 10. 24 中樞院官制(改正)
07. 5. 30 中樞院官制(改正)
07. 6. 14 內閣官制
Ⅲ. 立法機關
전제군주국가에 있어서 최고의 입법기관은 국왕이다
1896년 9월 24일에 제정 공포된 의정부관제 제3관제4조를 보면「의정부 회의에서 의결한 의안을 대군주폐하께서 재가하실 聖旨가 있으시면 標題(투표)의 다소를 불구하고 재가하실 수 있는 君權이 있으시고 該議案이 聖意에 不合하시면 勅敎하시어 再行討論하게 하실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을 미루어 보더라도 법률제정권은 궁극적으로 국왕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도 국왕이 恣意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살펴 본 바와같이 국왕이 국민에게 반포한 誓告文과 誓告綸音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君權을 행사한다는 국왕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君權 행사의 일부인 입법권의 행사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야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원칙은 다음과 같은 규정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모든 법률·칙령안은 내각회의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95. 3. 25제정 내각관제 제8조). 「비록 군주폐하의 聖慮(군주의 뜻)에 의한 안건이라도 내각의 의결을 거치지 아니하고는 시행할 수 없다」(내각사무판리규정 제9항)는 규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입법권의 행사에 있어 국왕의 자의를 억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입법제도 내지 입법기관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 관계 규정에 따라 입법에 관여하는 기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1. 軍國機務處
(1) 槪 說
군국기무처는 갑오경장의 개혁사무를 주도한 과도적 개혁입법기구이며 통상의 통치기구는 아니다.
일제의 개혁압력에 굴한 국왕은 1894년 6월 25일 조칙을 반포하여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총재이하 17명의 회의원을 임명하였다.
이 신설기구에는 일본공사 大鳥가 고문으로 취임했는데 그가 배후조종 내지 배후실력자로 군림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군국기무처는 설치 다음날인 6월 26일에 개청식을 가졌는데 개청식에 이어 개최된 제1차회의는 맨먼저 상정된 군국기무처관제안(전문14조)을 일사천리로 통과시키고 당일로 국왕의 재가까지 받았다.
뿐만아니라 그 이틀 후인 6월 28일에는 조선왕조 5백년의 의정제도를 개혁하는 의정부관제안(9장 84조)이 상정 되었는데 역시 당일로 의결, 국왕의 재가를 받아 공포까지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군국기무처는 형식내지 기구조직상으로는 의정부산하의 한 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초정부적 입법부의 행세를 한 가히 국왕의 권한보다 더 강대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다.
(2) 官 制
① 權 限
군국기무처관제를 보면 군국기무처는 「군국의 기무 및 일체사무의 개혁을 관장」(제1조) 하며 「모든 군국기무는 본처에서 의결한 후 稟旨 시행한다」(제2조)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제5조에서는 군국기무처의 관장사항을 다음과 같이 예시하고 있다.
ㄱ. 諸官衙官制의 신설 또는 개폐
ㄴ. 행정·사법에 관한 모든 규칙의 제정 또는 개폐
ㄷ. 田賦貨稅 및 재정에 관한 모든 규칙의 제정 또는 개폐
ㄹ. 軍政·學政과 식산 흥업 및 營商에 관한 일체의 사무
이밖에도 軍國에 관한 사무는 일응 그 모두를 회의에 상정하여 심의를 받도록 규정함으로서 군국기무처로 하여금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했던 것이다.
② 機 構
군국기무처관제 제3조 및 제4조를 보면 군국기무처의 기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총재·부총재 각1인
의 원 10인이상 20인 이하
서 기 관 2인내지 3인
1894년 6월 25일 군국기무처 설치와 함께 임명된 구성원은 총재에 총리대신 金弘集, 의원에 내무협관 朴定陽등 17명으로 모두 18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協辨 參議 留守 등으로 있으면서 의원을 겸직했는데 군국기무처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 것은 이들 18인이 아니라 이들의 擧手를 이용한 일본공사 大鳥이었다.
③ 議決節次
군국기무처관제(제7조 내지 제10조)에 의하면 회의의 의장과 부의장은 총재와 부총재가 각각 겸하고 있었다.
회의의 의안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의결 했으며 가부동수인 경우에는 의장이 결정하였다.
의안의 제출은 의장 부의장 의원 모두가 차별없이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의에 부의하기로 결정된 의안은 별도기초위원으로 하여금 정식의안으로 작성하여 회의에서 설명하게 하였다.
(3) 實 績
조선의 내정개혁은 본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따라서 군국기무처 역시 설정된 목표를 향하여 강경 일변도로 추진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결과 군국기무처는 설치된지 불과 3개월만에 무려 2백 8건의 중요법령을 의결·공포하는 實績 아닌 拙速을 범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졸속은 정치적 사회적 혼돈과 국민의 반감만 사게 되었다.
이러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井上은 국왕을 종용하여 군국기무처를 폐지(1894년 11월 21일)하고 중추원으로 그 기능을 대치시키는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서 군국기무처는 출범한지 5개월만에 막을 내렸는데 그렇다고 일제에 의한 개혁의 고삐가 늦추어 진 것은 아니었다.
2. 議政府·內閣
(1) 槪 說
의정부는 백관을 총리하고 사정을 펴며 국방을 다스리는(總百官 平庶政 經邦國) 국가의 중추적 통치기구이다(94. 6. 28 제정 의정부관제 제1항).
당초 의정부는 조선조 초기(정종2년)에 고려의 都評議使司를 개편한 것인데 그후 議政署事制가 폐지되면서 그 권한이 약화되었다.
조선조 중엽(중종10년)에는 전시비상기구인 備邊司가 창설되어 의정부는 더욱 유명무실한 기구로 되었는데 말엽(고종2년)에 이르러 비변사가 폐지됨으로서 의정부는 그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는듯 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회오리에 말려 그 기능은 다시 퇴색되었고 명칭마져 의정부 또는 내각으로 뒤바뀌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改編과 改稱은 저마다 배경이 있었으므로 이를 구분하여 그 특색과 함께 관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甲午更張과 議政府
① 배경과 특색
개혁주도기구인 군국기무처가 갑오개혁의 첫 사업으로 단행한 것이 의정부관제의 개편이었다.
근대국가의 내각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전문 9장 84조의 이 의정부관제(관제대비표 참조)는 1894년 6월 28일에 제정되었는데 이 관제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ㄱ.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시켜 왕족의 국정참여를 배제 한 것.
ㄴ. 의정부 산하의 六曹를 八衙門으로 개편하고 영의정을 총리대신, 판서를 대신으로 개칭한 것.
ㄷ. 군국기무처를 신설함으로써 의정부의 기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것.
ㄹ. 총리대신 직속보좌기관으로 유사사무처를 두는 한편 산하의 독립기관으로 군국기무처 등의 기관을 둔 것.
② 官 制
새로 제정된 의정부관제에 따라 그지위와 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위] 의정부는 백관을 총리하고 서정을 펴며 방국을 다스린다(제1조).
[조직] 의정부에는 총리대신 1인 좌우참찬 각1인 都憲 5인 參議 5인과 주사 33인을 둔다(제2조).
의정부에는 군국기무처등 10개의 處·院·局·署를 산하 독립기관으로 설치한다(제3조).
(3) 乙未改革과 內閣
① 배경과 특색
개혁의 졸속으로 실패를 자인한 일본은 보다 계략적인 제2차개혁안을 조선정부에 제시하였다.
이 을미개혁안을 거부할 힘이 없는 국왕은 1894년 12월 16일에 칙령제 16호로 議政府의 명칭을 內閣으로 개칭하고 이듬해 3월 25일에는 칙령제38호로 근대국가의 내각을 더욱 모방한 내각관제(관제대비표 참조)를 반포했다.
전문11조로된 이 내각관제와 부속관제의 특색은 대략 다음과 같다.
ㄱ. 내각의 구성원을 총리대신과 국무대신으로 한것.
ㄴ.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입법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을 설치함으로써 내각의 기능을 회복시킨것.
ㄷ. 의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개칭하고 8衙門을 7部로 개편한것.
ㄹ. 의정부산하기관을 축소시키고 총리대신직속보조기관으로 內閣總書(관제대비표 참조)를 둔것.
② 官 制
새로 제정된 내각관제에 따라 그 지위와 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위] 내각은 大君主陛下를 보필하여 邦國經理의 책임을 진다(제2조).
법률·칙령안 기타 중요한 국무는 내각회의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제8조).
[조직] 내각은 총리대신과 국무대신으로 구성한다(제1조).
서리대신도 국무대신에 준하여 모든 권한을 행사한다(제1조).
총리대신은 각대신의 수반이며 대군주폐하의 뜻을 받들어 행정각부의 통일을 기하고 모든 機務를 주무대신과 共行한다(제3조).
(4) 俄館播遷과 議政府
① 배경과 특색
왕비시해의 참변을 겪고 俄館으로 播遷하여 잠시 일제의 속박을 벗어난 국왕은 일제와 그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그간의 개혁조치를 무효라 선언하고 1896년 9월 24일에는 조칙을 반포하여 내각의 명칭과 일부편제를 종전의 의정부로 환원시켰다.
이날에 반포된 새 의정부관제(관제대비표 참조)는 전문 35조로 되어 있는데 그 특색은 대략 다음과 같다.
ㄱ. 내각과 총리대신의 명칭을 의정부와 의정으로 각각 환원시킨 것.
ㄴ. 의정부회의의 구성원으로 의정 및 국무대신 이외에 贊政과 參贊을 추가한 것.
ㄷ. 의정부회의에 국왕의 親臨 또는 황태자의 代臨을 규정한 것.
이와같은 일련의 개정은 그동안 약화되었던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여 갑오경장 이전의 모습으로 환원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새의정부관제는 그후 1898년 6월 18일과 1904년 3월 4일 그리고 1905년 2월 26일에 각각 개정된 바 있다.
② 官 制
새로 개편된 의정부관제에 따라 그 지위와 조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지위] 의정부는 법률안 기타 중요국무를 의결한다(제2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정의 최종결정권이 국왕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제3관제4조의 규정이다. 「의정부회의의 標題多少를 불구하고 대군주폐하께서 재가 하실 수 있다」는 요지의 이 규정은 갑오개혁 이후 제약받아 오던 왕권이 아관파천으로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면서 되살아 난 것을 명문화 한 것인데 그후 이 규정은 일본이 노일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이 노골화하던 1904년 3월 4일의 관제개편때에 삭제되고 말았다.
[조직] 의정부는 議政 1인 贊政 5인 參贊 1인과 각부대신으로 구성한다(제1관).
각부대신은 직권상 찬정을 겸직했다. 의정과 찬정 및 참찬은 勅任인데 참찬은 의정이 추천한다(제1관).
參政(내부대신 당연겸직)은 의정의 유고시에 회의의 수석이 되어 의정의 사무를 서리한다(제1관).
각부의 서리대신도 각부대신과 마찬가지로 의정부에 참여할 수 있다(제1관).
(5) 賣國政府로의 內閣改編
노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고 統監府를 설치하였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이중정부와 같은 기구하에서 형태만 남은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일제는 合邦을 위한 매국정부개조에 착수, 1907년 6월 14일에 내각관제를 개편하고 그명칭도 다시 내각으로 환원시켰다.
이 관제개편의 특색은 국왕의 영향력을 봉쇄하는데 있었는데 그후 이 내각의 御前會議에서 合邦을 의결함으로 亡國의 비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官 制 對 比 表
甲午更張下의 中央官制
---------------------
☆ 1894. 6. 25 갑오경장
· 1894. 6. 28 의정부관제개편
+--------------+
| 國 王 |
+--------------+
+------------------+
| |
+-+--+ +--------+-------------------+
| 宮 | | 議 政 府 |
| 內 | |----------------------------|
| 府 | | 參 都 右 左 總 |
+----+ | 議 憲 贊 贊 理 |
| 五 五 成 成 大 |
| 員 員 臣 |
+-----------------+----------+
|
+-----------------------+--------------------+
| 耆 會 編 官 銓 記 紀 中 都 機 |
| 老 計 史 報 考 錄 功 樞 察 務 |
| 署 局 局 局 局 局 局 院 院 處 |
+-----------------------+--------------------+
|
+-------+-------+-------+---+---+-------+-------+-------+
| | | | | | | |
+--+-+ +--+-+ +--+-+ +--+-+ +--+-+ +--+-+ +--+-+ +--+-+
| 農 | | 工 | | 學 | | 法 | | 軍 | | 度 | | 外 | | 內 |
| 商 | | 務 | | 務 | | 務 | | 務 | | 支 | | 務 | | 務 |
| 務 | | 衙 | | 衙 | | 衙 | | 衙 | | 衙 | | 衙 | | 衙 |
| 衙 | | 門 | | 門 | | 門 | | 門 | | 門 | | 門 | | 門 |
| 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 | | | | | | | | | | | | | |
+----+ +----+ +----+ +----+ +----+ +----+ +----+ +----+
協
辨
參
議
主
事
經國大典體制下의 中央官制
-------------------------
+--------------+
| 國 王 |
+-------+------+
|
+-----------------+-----------------+
| | |
+--+--+ +-----------+------------+ +-+--+
|義 承| | 議 政 府 | | 三 |
|禁 政| |------------------------| | |
|府 院| | 右 左 領 | | 司 |
+-----+ | 議 議 議 | +----+
| 政 政 政 |
|------------------------|
| 右 左 右 左 |
| 參 參 贊 贊 |
| 贊 贊 成 成 |
+------------+-----------+
|
+--------+-------+-------+--------+-------+-------+
| | | | | |
+-+--+ +--+-+ +--+-+ +--+-+ +--+-+ +--+-+
| 工 | | 刑 | | 兵 | | 禮 | | 戶 | | 吏 |
| 曹 | | 曹 | | 曹 | | 曹 | | 曹 | | 曹 |
| | | | | | | | | | | |
| 判 | | 判 | | 判 | | 判 | | 判 | | 判 |
| 書 | | 書 | | 書 | | 書 | | 書 | | 書 |
| | | | | | | | | | | |
+----+ +----+ +----+ +----+ +----+ +----+
參 參
議 判
郞
廳
俄館還宮후의 中央官制
---------------------
☆ 1896. 2. 11 아관파천
☆ 1896. 9. 24 의정부관제부활조칙
· 1896. 9. 24 의정부관제 개편
· 1898. 6. 18 의정부관제 개정
· 1904. 3. 4 의정부관제 개정
· 1905. 2. 26 의정부관제 개정
+----------------+
| 國 王 |
+--------+-------+
|
+------------------+--------------------+
| | |
+-+--+ +-----------+--------------+ +-+--+
| 宮 | | 議 政 府 | | 中 |
| 內 | |--------------------------| | 樞 |
| 部 | | 參 贊 贊 參 議 | | 院 |
+----+ | 政 政 | +----+
| 贊 政 |
| 六 內 |
| 一 五 部 部 |
| 大 大 |
| 人 人 臣 臣 政 |
| |
|--------------------------|
| 總 務 局 長 ※2 |
| 議 政 秘 書 官 |
| 參 書 官 |
+------------+-------------+
|
+------+------+------+------+------+------+
| | | | | | |
+--+-+ +--+-+ +--+-+ +--+-+ +--+-+ +--+-+ +--+-+
| 農 | | 學 | | 法 | | 軍 | | 度 | | 內 | | 外 |
| 商 | | | | | | | | | | | | |
| 工 | | 部 | | 部 | | 部 | | 支 | | 部 | | 部 |
| 部 | | | | | | | | 部 | | | | |
| | | | | | | | | | | | |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 | | | | | | | | | | | |
+----+ +----+ +----+ +----+ +----+ +----+ +----+
※2
+----------------------+
| |
+--+-+ +----+
| 總 | 參 | 議 | 秘
| 務 | 書 | 政 | 書
| 局 | 官 | 官 | 官
| | | 房 |
+--+-+ +--+-+
| |
+-------+-------+ +-------+------+
| | | | |
+-+--+ +-+--+ +-+--+ +-+--+ +--+-+
| 會 | | 官 | | 記 | | 文 | | 秘 |
| 計 | | 報 | | 錄 | | 書 | | 書 |
| 課 | | 課 | | 課 | | 課 | | 課 |
+----+ +----+ +----+ +----+ +----+
乙未改革下의 中央官制
----------------------
☆ 1894. 12. 16 을미개혁
☆ 1894. 12. 16 내각개칭(칙령 제16호)
· 1895. 3. 25 내각관제 제정
+--------------+
| 國 王 |
+-------+------+
+---------------------+---------------------+
| | |
+-+--+ +----------+------------+ +-+--+
| 宮 | | 內 閣 | | 中 |
| 內 | |-----------------------| | 樞 |
| 部 | | 總 理 大 臣 | | 院 |
+----+ | 國 務 大 臣 | +----+
|-----------------------|
| 內 閣 總 書※1 |
| 記 參 總 |
| 錄 書 理 |
| 局 官 秘 |
| 書 |
+------------+----------+
|
+--------+-------+------+--------+------+-------+
| | | | | | |
+-+--+ +--+-+ +--+-+ +-+--+ +--+-+ +-+--+ +-+--+
| 農 | | 學 | | 法 | | 軍 | | 度 | | 內 | | 外 |
| 商 | | | | | | | | | | | | |
| 工 | | 部 | | 部 | | 部 | | 支 | | 部 | | 部 |
| 部 | | | | | | | | 部 | | | | |
| | | | | | | | | | | | |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大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臣 |
| | | | | | | | | | | | | |
| 協 | | 協 | | 協 | | 協 | | 協 | | 協 | | 協 |
| 辨 | | 辨 | | 辨 | | 辨 | | 辨 | | 辨 | | 辨 |
| | | | | | | | | | | | | |
+----+ +----+ +----+ +----+ +----+ +----+ +----+
※1
+------------------+
| 內 閣 總 書 |
+--------+---------+
+----------------+---------------+
+--+-+ +-+--+ +--+-+
| 記 | | 參 | | 總 |
| | | 書 | | 理 |
| 錄 | | 官 | | 大 |
| | | 室 | | 臣 |
| 局 | | | | 官 |
| | | | | 房 |
+-+--+ +-+--+ +-+--+
| | |
+-------+-------+ +-------+-------+------+
| | | | | | |
+--+-+ +--+-+ +--+-+ +--+-+ +--+-+ +--+-+ +--+-+
| 史 | | 官 | | 編 | | 會 | | 調 | | 文 | | 秘 |
| 籍 | | 報 | | 錄 | | 計 | | 査 | | 書 | | 書 |
| 課 | | 課 | | 課 | | 課 | | 課 | | 課 | | 課 |
+----+ +----+ +----+ +----+ +----+ +----+ +----+
3. 中樞院
(1) 槪說
중추원은 법률·칙령안 기타 내각이 자문하는 사항을 심사 의정하는 국가기관이다(95. 3. 25 제정 중추원관제제1조).
중추원은 1894년 6월 28일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중앙관제에 따라 의정부 산하의 독립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설치당초의 중추원은 文·武·蔭의 資憲이상 實職이 없는 자를 單望(單數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하는 절차)으로 임명했으며 업무실적이 없는 한적한 기관이었다.
그후 중추원은 을미개혁에 착수하면서 개편한 중앙관제에 따라 군국기무처를 흡수하여 내각과는 독립된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1895년 3월 25일에 개편된 이 중추원은 법률안 기타 내각의 자문사항을 의정하는 기관이 됨으로써 형식상 입법기관을 연상하게 하는 중요기관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實像은 失勢 年老 大爵의 消日 내지 賣官場이었을 뿐 그 기능을 발휘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1898년 11월 2일에 개정된 중추원관제는 우리의 近代政治史 내지 法制史에 큰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비시해사건, 국왕의 아관파천 등 일련의 사태를 당하여 국민적 자각아래 항쟁을 거듭한 것은 일부 선각그룹이 지도하는 獨立協會 뿐이었다.
이들은 국왕의 환궁과 稱帝建元하여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애국활동을 王權의 制約으로 간주한 조정은 반동단체인 皇國協會를 조직하여 폭력으로 이들을 제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속에서도 국민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게된 獨立協會는 1898년 10월 30일 官民合作의 기치를 내걸고 각계의 대표를 초청한 가운데 萬民共同會를 개최하게 되었다.
각부대신 이하 각계각층의 인사가 참집한 가운데 이 대회는 「자주·근대화」를 골자로 하는 6개조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898년 11월 2일에는 국왕이 이 결의안을 받아드리는 조칙을 반포했으며 그 시행을 위하여 중추원관제를 개정(칙령 제36호)하기에 이른 것이다.
개정된 중추원관제의 주요내용은 ① 중추원은 법률·칙령의 제정 및 개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의정한다. ② 중추원의 의장은 황제가 勅授하되 부의장은 중추원에서 공천한다. ③ 의관의 반수는 政府가 추천하되 나머지 반수는 투표로 선거한다는 등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立憲君主制를 전제로한 議會政治의 初期形態를 의미하는 것이며 代議員의 民選을 최초로 규정한 획기적인 제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잠시일뿐 이 칙령반포 이틀후인 1898년 11월 4일에는 독립협회를 革罷하는 조clr을 내리는 한편 관계자를 체포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넘기면서 구국항쟁을 계속한 독립협회는 한때 다시 빛을 보기도 했으나 1898년 12월 25일의 조칙으로 일거에 탄압을 받아 해산되고 말았다.
모처럼 민중에 뿌리를 내리고 일어섰던 자주독립의 近代化運動은 이로서 막을 내렸다.
따라서 獨立協會라는 지지기반을 잃은 중추원관제의 근대화조항도 1899년 5월 22일의 개편에서 삭제되고 말았다.
(2) 地位
을미개혁으로 개편된 중추원관제(95. 3. 25 제정)를 중심으로 그 지위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중추원은 법률·칙령안 기타 내각에서 자문하는 사항을 심의 의정한다(제1조).
중추원회의에서 부결하거나 수정결의한 경우에도 내각은 원안대로 시행할 수 있다(제8조).
이와같은 규정으로 미루어 당시의 중추원은 자문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추원은 내각에서 교부하는 사항에 한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95. 4. 2 제정 중추원회의및처무규정 제1조).
또 중추원은 官署와 臣民의 건의서 기타 통신을 수령할 수 없으며(중추원회의및처무규정 제2조) 국무대신이나 각부의 협판과는 공무상 교섭을 할 수 있으나 그밖의 관서나 신민과는 문서왕래 기타의 교섭을 할 수 없다(중추원회의및처무규정 제3조).
이와같은 규정은 당시의 중추원이 폐쇄적이며 한정된 일을 하는 소극적인 기관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1898년 11월 2일에 개정된 중추원관제를 보면 중추원은 ① 법률 칙령의 제정 개정 폐지에 관한 사항 ② 의정부에서 經議上奏하는 일체사항 ③ 의정부에서 자문하는 사항 ④ 중추원에서 건의하는 사항 ⑤ 인민이 헌의하는 사항을 심의 의정한다(제1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 기구개편으로 중추원은 그 지위가 격상되어 의정부와 동격이 되었다.
의정부와 중추원의 의견이 서로 다를 때에는 府와 院이 합석협의하여 타협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直行하지 못한다(제12조)고한 규정도 중추원의 지위가 격상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보면 이때의 중추원은 國會의 초기 형태와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들 조항은 시행하여 보기도 전에 개정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3) 構 成
1895년 3월 25일에 공포된 중추원관제에 따라 그 구성내용을 살펴보면 중추원은
① 의장·부의장 각 1인 (칙임)
② 의 관 50인이하(칙임 또는 주임)
③ 참서관 2인이하(주임)
④ 주 사 4인이하(판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제2조).
의장과 부의장 및 의관은 다음의 자격이 있는자 중에서 내각회의 의결을 거쳐 총리대신이 추천하면 황제가 勅選하여 임명한다(제3조).
① 칙임관의 직에 있던 자
② 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
③ 정치·법률·理財의 학식에 통달한 자
의장은 중추원의 일체사무를 총괄하며 부의장은 의장의 직무를 보좌하고 의장의 유고시에는 그 직무를 대리한다(제4조).
참서관은 의장의 지휘를 받아 중추원의 상무를 관장하고(제5조) 주사는 상사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한다(제6조).
한편 1898년 11월 2일에 개정된 중추원관제를 보면 그 구성원이나 인원수는 종전의 규정과 차이가 없다(제2조).
그러나 그 구성방법에 관해서는 民選이라는 획기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 역사적 의의는 이미 설명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관계규정중 近代的條項만을 풀이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① 의장은 황제가 임명하더라도 부의장만은 중추원 자체에서 선출하며 황제는 형식적 임명권만 갖게 한다.
② 의관의 반수는 의정회의를 거처 정부에서 추천하되 국가유공자라야 하고 나머지 반수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 중에서 인민이 투표하여 선출한다. 다만 인민의 선거는 당분간 독립협회가 대행한다.
③ 의관(의장·부의장 포함)의 임기는 1년으로 하며 任期滿了 1개월 전에 후임의관을 선출하여야 한다.
참고로 관계조문을 원형그대로 여기에 소개하여 둔다.
「第3條 議長은 大皇帝陛下게압셔 聖簡으로 勅授하시고 副議長은 中樞院公薦을 因하야 勅授하시고 半數난 政府에서 國家에 노예가 曾有한 者로 會議 奏薦하고 半數난 人民協會中에서 二十七歲以上 人이 政治 法律學識에 通達한 者로 投票選擧할 事.
第4條 議長은 勅任一等이오 副議長은 勅任二等이오 議官은 奏任이니 敍 等은 無하고 任期난 各12個月로 定할 事.
但 議官期滿하기 前一朔에 後任議官을 預選할 事.
第16條 本官制 第3條中 人民選擧 現今間에 獨立協會로셔 行할 事」.
중추원관제는 그 후에도 여러번 개정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대의적 색채의 조항은 그때마다 삭제되거나 퇴색되어 그 후의 중추원은 당초의 유명무실한 기구로 되돌아 가고 말았다.
4. 補助機關
(1) 槪 說
내각(의정부)이 법률안 기타 중요국무를 의결하는 중추적 기관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군국기무처가 입법원을 전행한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5개월이란 짧은 기간의 과도적 현상이었다.
중추원이 입법의 자문 또는 의결기구로 설치되었으나 그것은 명목뿐이고 실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내각이 중요하고 방대한 국무를 처리하는 데에는 보조기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1895년 3월 25일에는 內閣所屬職員官制와 內閣所屬職員分課規定을 제정하여 보조기관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 보조기관의 설치규정은 의정부관제개편과 더불어 1896년 10월 9일에 議政府所屬職員官制와 議政府所屬職員分課規程으로 각각 개정되었으나 그 규정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기서는 이들 보조기관 중에서 주로 입법에 관여하는 기관만을 간추려 그 조직과 機能을 살펴보고저 한다.
(2) 組 織
내각소속직원관제(칙령제39호)에 보면 內閣所屬職員은
內閣總書 1인(칙임)
內閣記錄局長 1인(주임)
內閣參書官 2인이하(주임)
總理大臣秘書官 1인(주임)
內閣主事 18인이하(판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제1조).
내각총서는 총리대신의 명을 받아 내각의 서무를 총괄하며(제2조) 내각기록국장은 총서의 지휘에 따라 局務를 관장하고 소속직원을 감독한다(제4조).
내각참서관은 총서의 지휘에 따라 조칙 및 법률·명령의 발포에 관한 사항과 법률·명령안의 조사 기타의 사무를 관장한다(제3조).
기록국은 조칙 및 법률·칙령원본의 보존에 관한 사항과 관보의 편찬·발매에 관한 사항 기타의 사무를 관장한다(제5조).
이상과 같은 내각소속직원관제를 좀더 세분한 규정이 내각소속직원분과규정이다.
이 규정(관제대비표 참조)에 따르면
參書官室에는 문서과 조사과 회계과의 3개과가 있는데 조칙 및 법률·명령의 발포에 관한 사항은 문서과에서(제3조), 법률·명령안의 조사에 관한 사항은 조사과에서(제4조) 담당한다.
記錄局에는 편록과 관보과 사적과의 3개과가 있는데 조칙 및 법률·칙령의 원본 보존에 관한 사항은 편록과에서(제7조), 관보의 편찬과 발매에 관한 사항은 관보과에서(제8조) 담당한다.
(3) 機 能
내각에 상정한 의안은 각부대신이 請議書를 작성하여 내각총리대신에게 제출했는데 내각총리대신은 대체의 방침과 함께 이 청의서를 내각총서에게 하부하여 조사하게 하였다(청의서조사및각의안조제규칙제1조).
법률안의 제출도 이와같은 과정을 거처 내각에 청의되었는데 1895년 3월 25일에 제정된 「請議書調査幷閣議案調製規則에따라 법률안의 심사 및 조제에 관하여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총서가 총리대신으로부터 법률안을 수령하면 참서관을 지휘하여 그 법률안을 심사하게 되는데 이 심사업무는 주로 조사과에서 담당하였다(내각소속직원분과규정제3조).
이때의 심사기준(제2조)은
① 법률안의 주지가 다른 법률 명령 기타 규정에 저촉되는지 여부
② 법률이나 명령등에는 저촉하지 않더라도 舊貫이나 古禮에는 위배되는지의 여부
③ 법률안의 체질상으로 채택될 수 있는지의 여부
④ 법률안을 시행하면 각 관청간에 충돌이나 불균형이 생길 염려가 없는지의 여부 등이다.
내각총서가 위의 심사기준에 따라 심사를 마친 때에는 의견서를 갖춘 각의안을 조제하여야 하는데 이 때의 의견서 작성기준(제3조)은
① 다른 법령에 저촉되므로 부결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
② 구관·고례에 저촉하여도 가결하는 것이 어떤지의 여부
③ 다른 법령을 개정해서라도 가결하는 것이 어떤지의 여부
④ 관청간의 권한 충돌 때문에 부결할 것인지 권한을 변경시키더라도 가결할 것인지의 여부
⑤ 대체로 가결할 것인지 또는 수정하여 가결할 것인지의 여부 등이다.
이상과 같은 기준으로 보아 당시의 입법보조기관은 법안의 형식적심사 뿐만아니라 실직적심사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1896년 10월 9일에 개정된 의정부소속직원관제에는 법률·명령안의 조사에 관한 사무가 삭제되었다.
Ⅳ. 法令의 制定節次
1. 槪 說
법령제정절차는 그 종류(법률 칙령 각령 부령 등)에 따라 다르고 기관(의정부·내각 중추원 등)에 따라 달랐다. 또 시기에 따라 다르고 사안의 완급에 따라 달랐다. 가령 갑오개혁때의 제정절차와 을미개혁이후의 제정절차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전자의 예이고 사안이 긴급한 때에는 중추원의 자문을 거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후자의 예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모든 절차를 기술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의정부와 중추원으로 구분하여 법률과 칙령의 제정절차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한가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의정부와 내각을 한데 묶어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용어구사에 있어 가령 내각과 의정부, 부와 아문, 대신과 협판 등이 混用되고 있는 점이다.
2. 議政府·內閣
(1) 法令案의 上程節次
각부대신은 소관사무에 관한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 폐지 또는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 法令案을 작성하여 請議書 형식으로 내각에 제출하였다(명령반포식제2조, 각부관제통칙제3조).
이 청의서에는 주무대신이 그 이유를 상세히 기술하고 그 上面에는 제목을, 下面에는 서명 날인을 해야 하였다(각의제출장정제2조).
총리대신은 이 법령안을 내각총서에게 주어 조사 검토하게 하는데(각의안조제규칙제1조) 조사지시를 받은 총서는 참서관을 지휘하여 법령안을 심사, 각의안을 작성하게 된다(前記 4補助機關 (3) 機能欄 참조). 이 각의안에는 조사의견서와 청의서를 첨부해야 한다(각의안조제규칙제2조 및 제3조).
이렇게 작성된 각의안은 총서가 등사하여 회의기일 통보와 함께 각 대신에게 1부씩 송부해야 한다(각의안조제규칙제6조).
각의안은 내각참서관이 盖印을 하고 내각총서가 날인한 후에 내각회의에 제출되었다(각의결정장정제1조).
(2) 法令案의 審議節次
① 召集·開會
내각회의에는 정규회의와 임시회의가 있었다.
정규회의는 매3일마다 1회 개회하며(내각사무관리규정제1항) 임시회의는 내각총리대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 소집한다. 다른 국무대신은 임시회의가 필요한 경우에 그 소집을 내각총리대신에게 요구할 수 있다(내각사무관리규정제2항).
내각회의의 首席(의장)은 총리대신이 되며 수석이 有故한 때에는 다른 대신이 석차에 따라 수석의 권한을 대행한다(각의결정장정제3조).
회의의 개회 및 폐회는 총리대신이 행한다(96. 9. 24 의정부관제제2관제3조).
② 審議·議決
각대신은 평등한 지위에서 심의에 참여하여 국가전체의 이해를 고려하여 표결해야 하고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대신이 공동책임을 진다(각의결정장정제2항).
내각회의는 모두 비밀로 하며(내각사무관리규정제4항) 개회중에는 긴요한 직책이 없는 외부인사의 출입을 불허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11조).
내각회의는 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해야 개최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7조).
각부대신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때에는 협판으로 하여금 대신 참석하게 할 수 있는데 협판은 표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8조).
국왕의 특명으로 부의한 의안은 기립하여 낭독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12조).
의안내용과 제안이유를 설명할 때에는 끝까지 그 내용을 청취할 뿐이며 설명을 저지하거나 중도에 토론할 수 없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13조).
질의와 토론은 의장의 허가를 얻어 의장을 향해서 발언하여야 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16조).
모든 발언자는 기립하여 발언하며 발언중에는 다른 의원이 병행하여 발언할 수 없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과제17조).
통상의 의안은 1차심의가 끝나면 표제로 결정하는데(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18조) 의안이 복잡하거나 지리할 때에는 의장이 量宜(판단), 차회에 退定(회부)하여 계속 토론하게 할 수 있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19조).
제삼차회의에서도 결말이 나지 않을 때에는 의장이 결정한다(내각결정장정제9조).
의안에 대한 토론이 종결되면 충분히 심사한 연후에 표제를 수취하여야 하는데 合從(찬성)과 반대한 표제 다소를 즉시 선고해야 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관제20조).
「투표」에 관하여 규정한 의정부관제 제2관제21조는 「標題 受取한 時에 贊政의 성명 印出한 紙를 각 1장씩 각 贊政에게 배부하거든 각 贊政이 數語로 기명하여 可否를 書」 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투표는 회의원의 성명이 인쇄된 용지 즉 투표지를 받아 자기 성명 밑에 간단히 찬반의견을 기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안이 표결된 때에는 의장이 각 대신에게 순서에 따라 의안에 날인하게 했는데 총리대신은 최후에 날인을 했다. 총리대신의 날인이 끝난 때에 각의가 결정된 것으로 간주한다(각의결정장정제8조).
각대신이 의안에 찬성하지 않을 때에는 날인하지 아니하고 불찬하는 연유를 첨부할 수 있다(각의결정장정제7조).
회의에 상정된 의안은 원안과 토론한 詳細諸條의 筆記 및 표제 등을 簿案에 기록해야 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25조).
(3) 法令案의 奏請節次
① 中樞院 諮問
내각회의에서 법률안이 의결되면 중추원관제의 규정에 따라 일응 중추원의 자문에 회부하게 된다(각의결정장정제10조).
중추원에 의안을 송부할 때에는 일체의 부속서류를 첨부해야 하는데 그 송부서식은 다음과 같다(각의결정장정제11조).
+-----------------------------------------------+
| 건명 |
| 우는 귀원 회의에 회부하나이다. |
| 개국 년 월 일 |
| 내각총리대신 성명 |
| 주임대신 성명 |
+-----------------------------------------------+
법령안에 대한 모든 의결절차가 끝나면 국왕에게 재가를 주청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을미내각체제하에서의 奏請절차와 환궁이후 의정부체제하에서의 奏案절차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의 요지는 후자의 경우가 보다더 국왕의 의사를 존중하고 국왕에 대하여 경건한 절차를 갖추고 있는데 있다. 그래서 국왕에 대한 上奏절차는 내각의 奏請절차와 의정부의 奏案절차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② 內閣의 奏請節次
주청은 내각총리대신과 주무대신이 내각회의에서 의결된 의안의 淨本을 어전에 奉呈하는 것인데(내각사무판리규정 제6항) 국왕이 재가할 때에는 그 淨本에 국쇄를 찍게 된다(내각사무판리규정 제11항) 만일 국왕이 재가를 불허할 때에는 그 이유를 명시하여 재차 내각회의에 회부하게 된다(내각사무판리규정 제8조).
내각의 주청서식은 다음과 같다(재가주청및지령규칙 제1조).
+------------------------------------------------+
| 건명 |
| 右는 謹上奏 하와 |
| 聖明의 채택하심을 仰하옵나이다. |
| 개국 년 월 일 |
| 내각총리대신 성명 花押 |
| 주임대신 성명 花押 |
| (싸인) |
+------------------------------------------------+
③ 議政府의 奏案節次
의정부회의에서 의안의 토론과 표제가 끝나면 일주일 이내에 奏本(상주문)을 選出(작성)하여 의정이 폐하에게 奉呈한다(의정부관제제3관제1조).
주본에는 ①회의일자 ②회의참석자 및 불참자의 성명과 불참사유 ③의안의 목적·토론의 개요와 찬반자별 성명 ④의정과 참찬등을 기재해야 한다(의정부관제제3관제2조).
주본을 봉정할 때에 폐하의 諮詢이 있으면 의정이 상세하게 稟奏하고 관계 문서의 부본을 榻前에 奉呈하여야 한다(의정부관제제3관제3조).
폐하가 재가하고자 할 때에는 가부 標題의 다소를 불문하고 재가할 수 있으며 거부할 때에는 다시 토론하게 할 수 있다(의정부관제제3관제4조).
재가하는 의안에는 御押御璽를 鈐(찍다) 하시고 의정이 奉勅書名한후 의정부에 환부하여 관보에 반포케한다(의정부관제제3관제5조).
3. 中樞院
① 法令案의 上程
내각에서 의결된 법령안을 중추원회의에 부의하게 된다.
이 법령안을 접수한 의장은 참서관에게 하부하여 심사하게 한다(중추원회의 및 처무규정 제7조).
참서관은 의안을 검토하여 심사보고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직접 심사를 하거나 의관 1인 또는 수인에게 심사보고서를 작성하게 할 수 있다(처무규정 제7조).
이렇게하여 작성된 심사보고서는 의장에게 제출되는데 긴급한 경우에는 구두로 보고할 수 있다(처무규정 제8조).
구두로 보고할 때에는 사항부에 그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처무규정 제8조).
사항부는 회의 기일의 순서대로 의안의 성질, 심사보고서의 배부일시 및 회의기일 등을 기록하는 공부이다(처무규정 제11조).
② 開會
의장은 회의에 부의할 의안에 대하여 의사일정을 작성하여 개의일 2일전 까지 각 의관과 국무대신 및 협판에게 통보하여야 한다(처무규정 제12조).
회의 일시는 의장이 정하는데 국무대신은 그 기일의 변경을 청구할 수 있다(처무규정 제13조).
중추원의 개회시각은 3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로 하며 11월 1일부터 2월말일까지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5시까지로 한다(중추원의사규칙 제27조).
중추원회의는 의장이 수석이 되며 의장의 유고시에는 부의장이, 부의장 유고시에는 의관이 그 석차에 따라 수석이 된다(처무규정 제5조).
중추원회의의 좌석배치는 다음과 같이 한다(중추원의사규칙 제1조).
즉 의장이 중앙에 위치하고 부의장석은 그 좌측에 두며 의관은 그 품계와 勅·奏任 등급에 따라 좌우로 相對列座하고 참서관 1인이 의장의 좌측에 출석한다.
정부위원석은 의관석과 구분한다(의사규칙 제23조).
회의는 의관 3분의 2 이상이 출석해야 개회할 수 있다(처무규정 제4조).
의장은 출석한 의관이 정족수에 달하면 개회를 선언하는데 이때부터는 사담이 금지된다(의사규칙 제4조).
③ 審議
회의가 개회되면 회의수석이 참서관으로 하여금 의안을 낭독하게 하고 심사보고서를 작성한자에게 심사결과를 설명하게 한다.
이 낭독과 보고가 끝나면 토의에 들어가는데(처무규정 제14조) 의관은 수석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발언하지 못한다(처무규정 제15조).
발언을 하고자 하는 의관은 반드시 起座前進하여 수석에게 허가를 청해야 한다.
수석이 발언을 허가할 때에는 竹籤을 주는데 발언자는 이 죽첨을 受執하고 발언해야 하며 발언이 끝나면 그 죽첨을 반환해야 한다(의사규칙 제7조).
발언은 받드시 의장을 향해서 하여야 하며 각 의관이 직접 토론하지 못한다(의사규칙 제8조).
의관이 법률 칙령의 제정 개정 폐지에 관하여 필요한 의견이 있을 때에는 의장에게 제안하거나 發論할 수 있다(의사규칙 제12조).
의관의 發論과 駁議(발론에 대한 반대 의견)에는 1인이상의 協贊이 있어야 하는데 협찬이 있을 때에는 의장이 의관으로 하여금 그 의견을 발언하게 한다.
발언은 1인이 1사건에 3회 이내로 제한된다(의사규칙 제14조).
의장은 議事綱領에 대한 설명은 할 수 있으나 의안의 가부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 없다(의사규칙 제9조).
부의장은 의장의 직무를 대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언과 표결의 권한을 갖는다(의사규칙 제10조).
개회중 특별한 사고가 있거나 심의할 의안이 없는 때에는 의장은 정회를 선언하고 그 이유를 알려야 한다(의사규칙 제28조).
의사일정에 게재된 의안의 회의가 당일에 종료되지 아니한 때에는 廷會할 수 있다(처무규정 제17조).
토론이 끝난 때에는 수석이 의관으로 하여금 표결을 행하게 하고 그 결과를 선고해야 한다(처무규정 제16조).
중추원의 의사는 다수결에 의하며 가부동수인 경우에는 수석이 결정한다(의사규칙 제16,17조).
의관의 의결가부는 투표지의 자기성명밑에 自手標題하고 날인한다(의사규칙 제18조).
참서관은 출석한 의관의 성명과 발언내용 및 의사가부결말을 필기하여 공문일기에 편철(의사록작성)하여야 한다.
이 편철내용은 차기회의에서 낭독하여 의관의 이의가 없어야 한다(처무규정 제11조).
이상에서 설명한 의사절차는 다음과 같이 중추원의사규칙중 부칙으로 규정화되어 있다.
議事次序
1. 議長開會
2. 參書官 筆記朗續
3. 前會未決案 續論
4. 議政府諮詢案 議定
5. 本院建議
6. 人民獻議
7. 本院事務
8. 終會
④ 意見書送致
의안에 대한 중추원의 의견은 의결결과를 참서관이 문서로 작성하고 의장이 확인한다.
이 의견서에는 이유를 명시하고 중요사항의 토론요령서를 첨부해야 한다(처무규정 제18조).
중추원의견서는 의장이 내각총리대신에게 송치한다(처무규정 제19조).
중추원은 당초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중추원의 의견이 내각의 의견과 다른 경우가 생기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후 광무년대에 들어 비록 형식적이기는 했으나 중추원이 의결기관으로 격상된 후에는 중추원과 의정부의 의견을 조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1899년 5월 22일에 개정된 중추원관제에는 이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즉 의정부와 중추원의 의견이 不合할 때에는 府院合席會議에서 協議 타결하여 시행한다(제11조).
府院合席會議에는 주무대신이 임명한 의정부 위원이 중추원에 가서 의안의 취지를 설명한다(제12조). 다만 긴급한 사정이 있는 때에는 의정부에서 우선上奏하고 그 이유를 추후 설명할 수 있다(제11조).
⑤ 其他事項
중추원의 議事細則은 중추원에서 정한다(처무규정 제21조). 다만 1899년 5월 22일에 개정된 중추원관제에서 부터는 中樞院會議細則을 의정부에서 정하도록 하였다(제14조).
의관이 고의로 규칙을 위반하거나 의석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 때에는 의장이 정부에 통첩하여 해당의관을 견책 施罰하고 중대한 과실로 이러한 행위를 한 때에는 의장이 3일이내의 罰俸을 정하고 정부에 통첩하여 관보에 게재하게 한다(의사규칙 제25조).
의관의 犯則이 중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의장이 정부에 통첩하여 파면을 上奏하게 할 수 있다. 이때에는 의관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의사규칙 제26조).
4. 命令등의 制定節次
근대적 법률용어로서 명령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894년 11월 21일에 제정된 公文式 제15조의 규정이다.
여기서 명령은 「총리대신 및 각 아문대신이 법률·칙령의 범위내에서 직권 혹은 특별위임으로 법률·칙령을 시행하고 안녕질서를 보지 하기 위하여 발하는 것」(공문식 제4조)을 말한다.
오늘날 총리령에 해당하는 각령의 제1호는 1895년 4월 1일에 제정된 전문17조의 各部處務規程通則이다.
한편 1895년 3월 29일에 제정된 閣令 部令 訓令 告示 及 指令의 區分規程에 의하면 명령 이외에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훈령과 고시 및 지령이 있다.
훈령은 법률·명령의 범위내에서 長官이 그 소관관리 및 감독에 속하는 관리에게 훈시 혹은 명령하는 것을 말하고(제2항) 고시는 관청이 일정한 사항을 때때로 인민에게 고지하는 것을 말하며(제3항) 지령은 하관의 質稟에 대한 상관의 지시를 말한다(제4항).
여기서 이들 명령의 발령절차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의정부령(각령)은 총리대신이 발하는데 년월일을 기입하고 서명해야 한다(공문식 제7조 및 제8조).
아문령(부령)은 각 아문대신이 발하는데 연월일을 기입하고 서명해야 한다(공문식 제7조 및 제9조).
훈령도 이에 준하여 발령한다(공문식 제13조).
奏本으로 된 「部令·訓令·告示·廳令·府令을 發하는 節次에 관한 件」(1895. 3. 29)에 따르면 부령등을 발하거나 지령할 때에는 당해 관서는 그 등본을 내각기록국에 송부하여야 하는데 등본을 받은 내각기록국은 발령사항을 관보에 게재함과 동시에 내각총서에게 송부해야 한다.
내각총서는 당해 발령사항이 법률에 저촉되는지의 여부, 서로 모순되어 시행할 수 없는 것인지의 여부와 발령사항이 주무관의 직권에 속하는지의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
조사결과 만약 법률에 저촉하거나 권한범위를 넘어선 때에는 심사서를 갖추어 총리대신에게 제출하게 되는데 총리대신이 그 사유를 인정할 때에는 그 시행을 정지시키고 각의에 상정하게 된다.
5. 法令의 公布節次
법률·칙령은 上諭(국왕의 명령)로 公布한다(공문식 제1조).
법령안은 의정부의 의결과 중추원의 자문을 거처 국왕의 재가를 받게 된다.
국왕이 법령안을 재가하면 의정부에 환부하여 공포하게 되는데 국왕이 재가할 때에는 법령안에 親署한 후 御璽를 찍는다(공문식 제17조).
어새는 궁내부대신이 관장한다(공문식 제16조).
국왕이 친서하고 어새를 찍어 환부하면 내각 총리대신은 년월일을 기입하고 주무대신과 함께 부서한다(95. 3. 29 개정 공문식 제3조).
법령·칙령이 각대신의 소관사무에 유관한 때에는 당해대신이 연서한다. 그러나 협판은 대신을 대리하여 법령안에 부서하지 못한다(각부각아문통행규칙 제8조).
부서가 끝난 법령안은 공포하게 되는데 공포는 관보에 게재하는 것으로 한다(공문식 제15조).
공포에 관한 사무는 내각참서관실 문서과에서 관장한다(내각소속직원분과규정 제3조).
참서관은 법령안을 관보에 게재하는 외에 관례에 따라 적당한 처소에 게시할 수 있다(95. 5. 8 개정 공문식 제10조).
법령을 반포하는 관보에는 다음사항을 게재하여야 한다(96. 9. 24 의정부관제 제3관제6조).
①법률안에 국왕이 재가하였다는 사실
②의정 및 참찬의 서명 날인
③법률안의 조문(내용)
④당해 법령안으로 인하여 개정·폐지되는 법령
⑤당해 법안에 대한 御押 御璽한 사실
이리하여 공포된 법률은 공포일로부터 만30일이 경과하면 효력을 발생한다(95. 5. 8 개정 공문식 제10조).
다만 당해법령에 시행기일을 정하거나 사안의 성질상 반포일로부터 시행하여야 할 법령은 예외로 한다(95. 5. 8 개정 공문식 제11조).
이 효력 발생시기에 관하여 1894년 7월 12일에 제정된 명령반포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법률·명령은 관보로 반포하며 각 州縣은 관보 도달후 7일로 시행기한을 삼는다(제6조).
각 州縣은 程里의 遠近에 따라 관보도달 기한이 있으며 만약 천재지변으로 기한내에 도착하지 않은 때에는 도착 익일로 기한을 삼는다(제6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