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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관지(6)
  • 구분특집(저자 : 편집실)
  • 등록일 2009-01-01
  • 조회수 1,708
  • 담당 부서 대변인실
秋官志(6) 山訟 肅宗 43年 本曺의 啓에, 漢城府의 啓目에, 山所 關係로 爭端이 일어났을 때 發軍 투홍한 者와 放砲發射한 者는 傷人與否를 莫論하고 마땅히 嚴治할 바이나 奴子가 代身하여 擊錚한 者는 別途로 論罪할 것을 稟處한다 하였다. 律文內에 殺人을 圖謀하여도 일찌기 傷人치 아니한 者는 杖 1百과 徒 3年의 刑에, 傷하게 하여도 죽이지 아니한 者는 杖 1百과 流 3千里의 刑에, 山所 關係로 爭端이 일어났을 때 취당 鬪毆하거나 放砲 發射한 者로서 일찌기 傷人치 아니한 者는 杖 1百에 徒 3年의 律에 依하고 傷하게 하여도 죽이지 않았으면 杖 1百에 流 3千里의 律에 依한다 하였으니 이를 傍照하여 擬定토록 하고 奴子가 代身하여 擊錚한 者는 上書詐不以實의 律에 依하여 杖 1百에 徒 3年으로 施行토록 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重補〕今上 11年 中和 李命寬이 擊錚한 草供內에, 李景坑등이 祖先을 바꾸고 墓所를 빼았었으니 律에 依하여 勘繩하고, 代祖 李省의 墓前石을 곧 撤破하고 6塚을 壓葬하였으니 또한 파옮기도록 하여 달라 하였다. 本道의 査啓에, 1塚을 相爭함에 있어서 이미 明白히 잡을만한 證據도 없고 法으로서 從事토록 하였으나 마침내 잘못인줄 알면서도 訟事를 그칠줄 모르므로 李命寬을 照律치 않고 曉諭하여 放送한다 하였다. 曺의 回啓에, 1杯의 荒塚을 서로 爭執하여, 各其 祖先의 墓라 함은 乖倫悖常함이 이에 더할 수 없음으로 命寬은 嚴刑하여 放送한다 하였다. 判付內에, 道啓에 依하여 施行하라 하였다. 戊申 5月에 命寬이 또 擊錚한 原情內에, 李景沆이 저의 6代祖墓를 저의 8代組墓라 하고 또 저의를 同宗이라 하면서도 다시 庶孼이라 하니 各別히, 明査하여 달라 하였다. 曺의 草記에, 昨年 行査한 道啓에, 비록 百回 上言한다 할지라도 일병 勿施하라는 뜻으로서 登所하였은즉 또 天聽을 煩遽롭게 하였으니 진실로 痛駭가 極하므로 重勘하여야 한다 하였다. 傳敎로, 允許하고 李命寬은 杖 1百에 徒 3年으로 定配하라 하였다. 偸 葬 肅宗 24年 持平 尹星俊의 啓에, 옛날에는 墓而不墳하였으나 後世에 棺으로 封하여 폄장하는 制度가 있게 됨은 體魂을 便安하게 함에 不過할 뿐인지라, 風水說에 晉魏에서 용우으로 된 것이 今日에 이르러 서는 流弊가 이미 極하고 窮達과 禍福은 스스로 天命에 있는 것이며 地理에 어찌 있다 하리요 만은 衆人이 알지 못하고 妄意로 營求하여 堪輿를 崇信하여 그 心術를 破壞하더니 近來 士夫들도 遷葬치 아니한 者 10에 2·3밖에 없고 生民이 이미 오래 됨에 空地가 거이 없으며 偸葬이 그치지 아니 함은 賂物을 貪하여 사람을 미치게 하는 職業을 가진 地師의 所致에 緣由함인지라, 지금부터는 主山과 人家 近處에 營葬하므로 起訟하는 者 있으면 먼저 地師를 다스려 嚴刑을 1次한 後에 그 訴訟을 審理하고, 理屈한 者는 法에 依하여 파옮기고, 그 主喪人은 嚴刑하여 定配할 것을 定式 施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本曺의 回啓에, 大明律에, 發塚條에 主墳山에 盜葬한 者는 杖 80에 勒限移葬한다 하였으니 이 律에 依하여 主山과 人家 近處에 盜葬하고 理屈한 者 있으면 接訟하기 前에 偸葬한 者는 士夫와 常漢을 莫論하고 贖罪를 排除하고는 杖刑을 執行하고, 地師의 嚴刑에 있어서는 煩苛한 念慮가 없지 아니하여 施行하기 困難함이 있음으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고 地師의 嚴刑은 得當한줄 모르면 勿施하라 하였다. 遷 葬 肅宗 17年 都承旨 沈檀의 所啓에, 近來 士夫家에서 堪輿의 術法에 迷惑하여 遷葬하는 일이 많으며 監司·守令에 이르러서도 本道·本邑의 近地에 占山하여 비록 數百戶의 大村이라 할지라도 或은 愚珉을 威脅하여 家舍를 억지로 뜯어내고 或은 官에 있으면서 山理를 점처서 因하여 家舍를 設置하여 日後의 居生할 計劃을 함으로써 土地를 가진 者는 빼앗기고, 安居하든 者도 處所를 잃게 되며, 監司도 이미 犯禁하고, 守令은 더욱 忌憚함이 없으니, 別樣으로 禁斷하는 道理가 없어서는 않된다 하였다. 임금께서 擧條를 내어 各別히 禁斷하되, 萬若 現出한 것이 있으면 別樣으로 論罪하라 하였다. 24年 임금께서 近來의 遷葬은 實로 痼疾의 弊端이 되었도다. 두번, 세번 甚至於는 4·5巡에 이르나 風水로서 擇地함은 人子의 情理에 能히 알 수 없으나 堪輿를 崇信하고, 迷惑함은 實로 士夫間의 弊風이니, 마땅히 申飭하는 道理가 있어야 한다 하였다. 右議政 崔錫鼎은, 臣이 都憲으로 在職할 때의 陳啓에 무릇 山訟에 關한 것은 爲先 相地官을 刑推하여 理致가 바르지 않으면 主喪者를 定配하여야 한다 하였으나 該曺의 循例의 回啓에, 實效없는 것이라 하였다. 應敎 金時傑은 魚孝膽이 일찌기 地理說의 잘못임을 生論하더니 그 亡親을 家園옆에 葬禮하였으며 그가 죽음에 그 子 世謙등이 孝膽을 水濱에서 葬禮하여 擇地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으나 後孫에 別로 禍敗가 없었으니 萬若 이들의 일로서 理論을 引用하여 曉諭한다면 可히 弊風을 矯正하는 道理가 되리라 하였다. 임금께서, 丁卯年 地師의 陳疏로 因하여 長陵을 奉審함이 있었으나 代遠한 陵寢은 山家의 말에 擾惑할 수 없음으로 遷陵할 會議는 그만 둔다 하였다. 戶曺判書 李濡는 風水에 迷惑되어 大村中에서 用山하는 것은 진실로 嚴禁하여야 하고, 비록 禮葬을 應給하는 喪事라 할지라도 遷葬할 時는, 題給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하였다. 傳敎로, 遷葬을 勿許함이 可하다 하였다. 英宗 10年 藥房 都提調 徐命均의 所啓에, 일찌기 肅廟朝에 있어서 勳戚大臣의 遷葬에는 禮葬을 勿許할 것을 筵敎로서 定式하온지라 今番 靑平尉의 遷葬時에 禮葬의 命令이 있었음은 엎드려 생각건대 聖上께서 或 攷例에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리라 하였다. 임금께서, 果然 알지 못하였노라 하였다. 命均은, 大臣의 遷葬時에, 비록 禮葬은 許하지 않을지라도 葬需와 擔軍은 連하여 參酌하여 題給하였으니 듣건대 故相 趙相愚를 지금 遷葬한다 하므로 敢히 奏達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葬需와 擔軍을 參酌하여 題給하고, 此後로 遷葬하는 者에게는 禮葬을 勿許할 것을 定式 施行하라 하였다. 〔重補〕 私 掘 今上 6年 安東 李聖雄의 上信內에, 저의 父 重昌이 他人의 墳境를 私掘하여 棺을 露出한 罪로서 洪川으로 定配되었으니 特히 釋放하여 달라 하였다. 曺의 回啓에, 私掘한 罪人은 10年을 限하여 釋放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先朝의 受敎가 있으니 어떻게 處置하오리까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9年 陽城 徐順福이 擊錚한 原情內에, 저의 50戶의 民人이 本縣 經東面에서 世居하고 있는 바 昨年 10月 陽智에 사는 李大峻이 그 아비를 저의 등이 所居하는 家岱內에 偸葬하였음으로 本官에 狂狀하였더니 李哥를 捉囚하여 파옮길 것을 다짐한 後 自手로 破掘하고 民人에게 罪를 돌려 畿營에 誣訴하므로 저의 兄 狂赤과 村民人이 嚴囚被刑되었으니 特別히 分揀하여 달라 하였다. 本道의 査啓에, 判付內에, 設令 李大峻이 果然 自掘하지 않었으면 孫尙辰등의 松掘이 明白하고 被殺된 尙辰등 3人中 1人은 먼저 病斃되었으니 本事件이 문득 究竟에 屈한 것이나 오히려 해가 지내도록 囚推하고 또 照律定配코져 하니 이것이 大明律의 法文인가 大典의 定式인가 어찌 저같은 訟體가 있으리요. 비록 殺獄으로서 말 할지라도 여러 被告中에 한 사람이 致斃되었으면 남어지는 아울러 生科에 두어야 마땅하거든 하물며 이 미생과 薄犯이 關重한 者보다 더 甚함이 없는가. 다만 이뿐 아니라 大峻의 偸葬이 이미 大村의 家岱內에 있고 當日 掘移할 뜻으로서 官에서 이미 公決하였고 저도 또한 다짐하였으니 尙辰輩가 設或 먼저 下手하였다 할지라도 이는 官掘이 아니며 이는 大峻의 自掘이요 尙辰輩의 私掘이 아닌지라, 由前由後한 이 訟事는 그만두는 것이 可하고, 몸이 査官이되어 何敢히 緊着하지 않는 말과 倫脊이 없는 供述로서 鋪張·려열하여 辭然히 번매하는가, 또 昨年겨울 赦典에 절름발이 같은 것은 다 나가고 優先으로 赦하여야 할 것은 釋放치 않았음은 이는 크게 法外인 것이나 이 1款은 오로지 跋語中에 참급함이 없음으로 循例로 判下한지라, 此後 人家의 壓近한 곳에 將次 禁葬하지 않는다면 한 요마같은 大峻의 偸葬으로 因하여 村人의 病死·하사가 4人의 多數에 이르렀다하니 査官도 또한 生命이 있는 吏員인지라 이 人命의 致斃에 動念치 아니한 此等 査官을 將次 어디에 쓰리요. 利川府使 沈규영은 該曺로 하여금 發緘取招하여서 듣도록 하고, 卿은 査官의 입만 徒仰하여 한번도 別樣의 意見을 내지 않었으니 소홀함이 甚한지라 推考하고, 孫尙辰等은 放送하고, 徐順福은 그 兄이 이미 하폐한 地境에 이르렀은즉 더욱 더 물을 것이 없는 지라 또한 放送하고 李大峻은 當初에 壓葬한 것이 이미 法을 蔑視하고 禁斷함을 冒犯한 罪가 있고, 또 特敎로 按査하는 밑에서 遊辭로 陳述한 것은 民習이 비록 痛駁함이 極하나 伊時 事情을 仔細히 參考하면 좀더 그 兄이 歸還한 後를 기다려 掘移한다 하였으니 人情으로서 揆察한다면 容或 無怪할 것 같으나 萬若 白放한다면 民習을 바로 잡고 民居를 奠接할 수 없음으로 山在官에 分付하여 紙洞村의 民人을 聚會하여 杖刑을 執行하고, 放送하라 하였다. 同年 忠淸監司 李得臣의 査啓에, 結城 崔興大의 山訟으로 上京한 것은 興大의 偸葬은 이미 落科되고 李邦喆의 傷棺한 罪 이미 刑配를 지냈으나 崔哥의 斷斷히 말지 않겠다는 所以는 하나는 官에 狂訴하여 出殯케하고 하나는 撰辭의 후욕이라하니 그 辭意가 駭悖 하므로 可히 懲戒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曺의 回啓에, 判付內에 李啓喆이 朽棺을 揷破한 것은 露屍와 다름이 없는 것이나, 歌曲을 만들어 傳播함은 伐葬보다 더 甚하고 下手는 至極히 慘毒하고, 用意는 至極히 巧惡한데 저가 當律을 幸免한 것은 이미 너무 寬容함에서 失手된 것이니 이 일을 登徹한 後는 이미 刑配를 지냈다는 것으로서 勿論하는 科에 둘수 없는지라 邦喆은 嚴刑을 1次하여 限年하지 말고 遠地로 定配하여 土豪의 武斷하는 弊習을 懲戒하라 하였다. 14年 傳敎에, 近來 到配하는 狀況의 首尾가 陸續한 것은, 墳墓를 私掘하여 露棺한 罪人이라 비록 오늘날 放未放의 啓本으로서 말하드라도 十中十은 卽 그 罪이며 邦禁의 蕩然에 말미아마 百姓이 法을 두려워하지 않고 山地의 訟事하기를 질기는 무리가 또 어찌 옛날보다 지금이 더 많아서 그런 것이리요. 이는 대개 各 該道伯이 怨訴를 맡으면서도 懲一하는 政事를 行하고져 아니하므로 能히 未然에 嚴楫하지 아니하니 일의 駭然함은 무었이 이에서 더하리요. 하물며 先朝에서 法을 制定하여 飭禁함이 至極히 截嚴한즉 諸道의 擧行이 더욱 어찌 敢히 이러하랴. 此後 各道에서 1年內에 이 일로서 發配함이 과연한 者는 該道臣을 拿處하고, 不禁한 守令은 同罪로 論하고, 贖을 거두어 發配하지 않고 다만 配文의 名數를 감하다가 現發됨이 있어도 또한 그 責任을 免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로서 朝紙에 謄寫하여 頌布하고, 仍하여 該曺로 하여금 諸道에 嚴飭하여 다시 犯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同年 南陽 吳成羽의 上言內에, 洪熙啓가 저의 先山에 勒葬하므로 저의 父 錫履와 諸族이 掘去하였드니 寶城으로 安配되온지라 私掘의 罪는 3年 徒配한다 하는바 10年으로 限함은 寃枉하니 特放하여 달라 하였다. 判付內에, 私掘의 律을 徒年으로서 한다 함은 비록 鄕曲無識이라 할지라도 이같음으로 輕犯함이 無難하니 仍하여 刑官으로 하여금 先朝의 受敎內 辭意로서 申明하고 효諭하여 유미의 效果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曺의 回啓에, 私掘한 罪人을 限 10年 勿放함은 이미 先朝의 受敎가 있은 즉 徒年으로 請放함은 無嚴하니 上言은 勿施하고 삼가 受敎內 辭意로서 曉論한 後猥越한 罪를 嚴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15年 永同 金思運이 擊錚하는 原情에, 掘 된 일로 因한 判付內에, 昨年 頌示한 朝禁이 어찌되어 私掘 2字가 또 登徹하는 供招에 들었으니 當該 道臣과 守令은 마땅히 式에 依하여 勘處할 터이나 일이 昧桑以前에 屬하므로 그만 두고, 다시 本曺로 하여금 各別히 嚴飭하여 前과 같이 犯科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掘塚入葬 英宗 10年 平壤人 金光碧이 江東 自漢(自漢의 姓은 未詳)의 5代組 墳墓를 掘破하고 그 妻를 偸葬하였음으로 江東官이 光碧과 其子 太甲을 捉囚하여 査問한 바 不服한지라, 監司 朴師洙의 啓本에, 偸葬한 屍體는 光碧에 있어서는 妻이며, 太甲에 있어서는 母이나, 太甲은 年弱하고 光碧의 年齡은 78歲이니 모두 加刑하여 取服할 수 없음으로 該曺로하여금 稟處하라 하였다. 判付內에, 王者의 用刑은 마땅히 用意와 無心을 살펴야 한다. 비록 風水에 迷惑되어 古塚에 偸葬하였다 할지라도 他人의 骸骨를 어찌 其妻·其母의 壙中에 둘 수 있으랴. 이는 내 能히 酌處할 수 없는 것이니 諸大臣에게 議論하여 風水의 類로서 惑世誣民한 張士方이 他人의 古塚을 指定하여 그 骸骨를 暴露케 하였으니 그 罪 혼질한 光碧에 有浮하고 穉駿한 太甲을 各別 譏捕하여 嚴刑으로 取招하여 들리라 하였다. 右議政 金與慶은 家人이 共犯함에 尊長이 緣坐하는 律로서 揆察한다면 光碧을 빼고 太甲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奉朝賀 閔鎭遠은 金太甲만을 依法 處斷함이 惶恐 得宜라하였다. 判府事 沈壽賢은 罪는 마땅히 光碧에 있고 太甲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判付內에의, 頃者判付는 이미 諭示로 마침내 極律로 處置함은 惟輕하는 뜻이 아님으로 光碧은 減死하여 絶島로 定配하고, 太甲은 遠地로 安配하라 하였다. 上納 上納定式 肅宗 45年 知敦寧 閔鎭遠의 所達에, 外邑에서 貢賦하는 軍布를 色吏들이 京·外 牟利輩와 더불어 用奸에 符同하여 곧 備納치 아니한 者는 軍布를 다 받어 드린 後에 刑曺로 移送하여 律에 비추어 勘罪하고, 守令이 兩件陳省으로 보내는 者는 拿問 定罪하되 承傳을 받들어 施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令하여, 이에 依하라 하였다. 閔鎭遠은, 外方에서 錢布를 上送할 때는 먼저 該衙門에 發行狀을 보내고, 發行한 後에 所經하는 各邑은 밤이면 官庫에 入置하여 某日 本邑을 지나갔다는 뜻을 仍便으로 該衙門에 卽報하여 미리 그 오는 것을 알도록 하면 거이 用奸하는 弊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이로서 定式하고 穀物의 船運같은 것은 忠淸水使와 江華留守가 미리 그 去來를 馳報토록 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令하여 이르기를, 이에 依하라 하였다. 大同木失火 英宗 12年 右參贊 趙顯命의 所啓에, 지난날 大臣이 沃川 大同木을 旅店에서 燒火된 것을 陳達하여 蕩減하였으나 日後에 萬若 監色들이 스스로 偸竊하고도 故意로 人家를 燒火하여 大同木도 이에 燒失되었다고 稱託하여 이 例를 援用코져 한다면 將次 어떻게 別白할 것인가 하였다. 右議政 宋寅明은 堂上이 例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 인지라 그러나 朝家는 대체로 이를 말한다면 이미 還收하기 어려운 것을 明白히 알면서 어떻게 後弊를 過慮하여 全혀 寬大히 蕩減하는 政事가 없어서야 되리요 하였다. 顯命이 말하기를, 萬若 還收하기 어렵다면 監色을 嚴刑하여 遠地로 定配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에 依하라 하였다. 大同米和水 23年 左參贊 鄭羽良의 所啓에, 大同米에 和水한 船人은 마땅히 梟示하여야 할 터이나 萬若 米의 色態와 米의品質이 疑信間에 있는 것은 刑曺에 移送하여 嚴刑 定配하여 懲一礪百으로 用奸을 妨止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이르기를, 允許하였다. 大同敗船 肅宗 49年 常平倉의 啓辭에 因한 本曺의 啓目에, 洪陽監色 朴元理와 沙工 善등은 米穀을 裝載하고 1朔을 지내서야 비로소 發船함으로써 覆沒을 이르킨 形狀은 極히 痛駭한지라 漕轉事目內에, 定限에 未及한 該邑의 鄕所 色吏는 嚴刑 定配한다 하였으니 朴元理와 善등은 徒 3年으로 定配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이르기를, 允許하였다. 英宗 12年 右議政 宋寅明의 所啓에, 무릇 敗船한 罪人은 囚推한지 滿 3年이면 推 10次로 刑訊한 然後에 原籍官에 移送하여 구핵토록 함은 이것이 事目이었으나 지금 無數의 대내하에 雜犯罪囚들은 擧皆 蒙宥되었으니 敗船罪人들도 一體로 疏放함이 朝家의 好生하는 道理에 害로움이 없을 것이므로 秋曺로 하여금 文案을 取見하여 故意로 敗船한 可擬者와 敗船이 明白한 者를 區分하여 稟處토록 함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에 依하라 하였다. 大同無面 肅宗 24年 大司憲 閔鎭厚의 所啓에, 近者 凶年이 거듭됨으로써 船人들의 國穀을 偸竊함이 特甚하여 1船의 無面이 或은 百餘石에 이르름은 至極히 寒心한 일이므로 可히 各別 科治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今年 大同無面이 가장 말은 사람은 臨時에 啓稟하여 梟示의 律로서 施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敦寧 徐文重은 말하기를 米穀을 裝載한 後 卽時 發船하지 아니하므로 이러한 偸竊事故가 생기니 此後로는 곧 發船토록 催促함이 좋으리리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連다라 凶年을 만남에 奸僞가 漸漸말으니 別樣으로 嚴治하되, 船人은 梟示하고, 時期를 느추어 發船한 守令도 또한 論罪할 것을 永久 定式으로 하라 하였다. 〔重補〕 大同防納 今上 12年 戶曺의 啓辭에, 興陽 田稅穀을 積載한 船1隻이 京江에 이르러 致敗된 後 元陳省의 所載에는, 明禮宮과 義烈宮의 免稅米는 다른 小船으로 싣고 왔다 하고 當宮에 가서 告하기는 上納하였다 하니 陣省穀物을 他船에 各各 積載하다는 것은 前에도 없었던 일이며 180石의 宮納米를 小船에 分載하여 千里를 航海하였다는 것은 事理에 닫지 아니 하니 그 問에 반드시 作奸한 일이 있었을 것이나 事實을 全部 牢諱하므로 嚴重히 調査하여 그 實情을 確認하기까지 推究하여야 한다 하였다. 傳敎에, 宮納事로서 昨年 飭敎한 것이 다만 截嚴할뿐 아니라 本曺에 屬한 것은 곧 百姓을 爲하고 弊端을 除去함에 나온 것이며, 初元의 式令을 有司의 遵守할 義務 또한 敢히 歇後하지 못할 것이나. 近來 許多한 奸弊를 枚擧하기도 어렵고, 畢竟은 그 害가 小民에게 돌아가니, 일이 말할 수 없으며 무었이 이에 더 甚하리요. 朝廷의 擧措를 마땅히 現發處에 따라 懲勵한 後 昨日의 所謂 敗船한 것과 今日의 所謂 分載한 것은 이는 中間에서 다른 作傭이 없었다면 저들이 마음대로 行하도록 맡겨서 그러 함인지라. 대저 防納을 禁하지 않음으로 弊위에 弊가 나니 有司의 臣이 좀더 嚴核하고 詳察한다면 어찌 그 弊를 革罷할 道理가 없으리요. 辛苦로된 粒粒은 모두 小民의 膏血로 부터 나온 것이나 그 爲弊에 미침이 이같고 甚至於 拯米·劣米를 徵收하는 弊를 도리어 小民에게 돌리니 可憐한 이 小民은 무었을 믿고 살 것인가 分載한 1款은 반다시 防納에 있을 것이며 防納한 1款은 반다시 作奸에 있을 것이니 刑曺로 하여금 囚禁된 諸人에 대하여는 尋常을 排除하고, 各別히 施威하여 實情을 究明하여 얻게하고, 한편 痛繩으로서 後日을 懲戒하고, 한편 小民에게 慰務하는 뜻을 보이고, 그 反隅의 義에 있어서는 京司에서 한번 査治하고 그치는 것은 不可하니 仍하여 廟堂으로 하여금 이 傳敎를 장차 船運하는 邑과 諸道 道伯에게 嚴飭하여 뒤에 또다시 이러한 事實의 現發이 있으면 守令은 重勘하고, 監司 또한 不飭한 責任이 있을 터이니 一時의 飭令이라 하지 말고 向後에 中陷事가 일으지 않도록 各別 嚴飭함이 可하다 하였다. 〔補〕 點退布木 仁祖 21年 傳旨에, 度量衡의 律을 같이하여 人心을 整齊함은 令甲에 記載되어 있음으로 一時 有司가 敢히 마음대로 내리고 올릴수 없는 것이며 尺度를 頒布함에 이르러서는 八方에 行會하였으나 該官이 命令을 저버리고 利益만를 먼저하여 點退를 일삼으니 그 怨望은 君上에 돌아오고 民生은 信念을 일케되니 그 무었이 이에 더 甚하랴. 戶·兵曺의 正郞과 都監·郞廳은 아울러 拿推하라 하였다. 情債科罪 英宗 13年 右議政 宋寅明의 所啓에, 近來 情債가 가장 고폐로 되어있으니 今後 萬若 現露한 者 있으면 다만 下人뿐만 아니라 아울러 官員으로 더불어 從重 科罪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依하라 하였다. 〔重補〕 今上 15年 戶曺의 草記에, 慶尙道 漕船하는 沙格의 所告를 接한즉, 軍資監의 倉屬이 別人의 精米 5石과 太 1石을 奪取하므로 돌려달라 한즉 郞官에 알소하여 嚴杖으로 猝入하고 米太는 諸蓮池에 던져 버렸다한다. 倉屬이 科外의 것을 侵漁함을 처음은 査治하지 않았으나 擧措가 駭悖하므로 所犯한 員役을 秋曺에 移送하여 法에 비추어 重繩하고, 主簿 全聲九는 嚴勘한다 하였다. 傳敎에, 金聲九의 所爲는 萬萬 無狀한지라. 船人을 侵漁하는 犯法도 오히려 可惡하거던 하물며 下屬을 爲하여 逞憤하여 粒粒이 辛苦로된 穀物을 池中에 던져 버린 것은 어찌 저같은 所爲가 있을 수 있으랴. 今日內 該漕倉의 地方으로 星火 定配하여 道伯의 秋巡을 기다려 民人大會의 所見處에서 曉諭하여 決杖을 嚴加한 後에 狀聞하고 下屬들은 各別 嚴刑하여 定配하라 하였다. 軍務 〔補〕 違法除軍 仁祖 16年 禁府의 啓에, 通津縣監 柳志和를 照律할 때 삼가 宣祖朝 萬曆 甲辰年의 軍籍에 關한 事目內를 按하건대 時存人이 逃亡한 것과 生存人이 物故한 것은 아울러 違法除軍의 例에 依하여 論한다 하였으나 違法除軍條에 7人以上은 守令을 罷職한다 하였으니 柳志和의 罪犯은 7人에 그치지 아니하므로 罷職은 輕한 것 같고 制書有違로서 杖 1百과 告身의 追奪을 斷行키로 照入하였드니 이제 下敎를 奉承함에 다른 比律이 없고 對制 上書의 詐不以實로서 杖 1百과 徒 3年의 刑으로 함이 妥當하다는 付標를 고쳐왔으나 이 律은 좀 重할것 같음으로 敢히 稟奏한다 하였다. 傳敎로, 重罪에 따라 論斷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逃故未 英宗 11年 備邊司의 啓에, 漢城府右尹 李瑜의 所啓로 因하여 軍額의 逃故를 充定치 못한 守令과 次知·座首·色吏의 論罪를 定式할 것을 商確하여 節目을 만들어서 드리라는 命令이 있는지라 逃故를 充定하지 못한 20名 以上에 대하여는 守令은 定配하고, 次知와 監色은 嚴刑하여 全家를 邊地로 옮기고, 19名以下는 守令은 削職하고, 次知와 鄕色은 嚴刑하여 中途에 定配하고, 5名以下는 守令은 罷職하고, 次知와 京鄕色은 京司에서 拿致하여 嚴刑할 것을 定式으로하여 諸道에 申飭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允許하였다. 戰船腐傷 肅宗 10年 慶尙監司 徐文重의 啓本에 因한 備邊司의 啓目內에, 戰船을 年限이 차기 前에 腐傷되어 움직이지 못한 것은 當該 守令과 邊將을 重律로서 勘繩한다 함은 本司에서 이미 覆啓되었으나 近來 莫重한 戰船을 着實히 監造하지 못하여 年限이 차기 前에 腐破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者 흔히 있으니 軍政으로서 糾察한다면 可駭 莫甚한지라 金海 前府使 朴贄今은 이 罪로서 杖 1百과 邊遠에 發配하고 守禦는 이 律에 依하여 定式 科罪할 뜻을 該道에 分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重補〕 今上 12年 兵曺의 啓辭에, 試射를 罷하고 돌아오는 길에 閑良들이 徒黨을 데리고 前陪將校 沈公綽이 그 呵禁時에 言語가 不恭하다 하여 猝地에서 이를 猝下하고 그 群衆이 拳 을 加하므로 바야흐로 死境에 있는지라 首犯人 尹哥·金哥를 爲先 睾限內에 捉囚할 뜻을 秋曺에 移文하여 用刑을 기다려 嚴刑하여 照律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大司馬는 一國의 戎政을 管掌하여 비록 元戎의 重陣이라 할지라도 또한 예속하거든 하물며 末端의 요마같은 閑良이랴, 지금의 大司馬가 비록 옛날의 大司馬와는 같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職位는 果然 어떠한가. 이 草記를 보건대 帶校를 猝打함은 姑捨하고 비록 帶校아니 帶卒이라 할지라도 名色이 閑良이란 것이 한번 犯手함이 있으니 그 結果는 大司馬를 凌犯함과 무엇이 다르리요. 從前 閑良들의 作幣·작나가 비록 駭悖措한擧措가 있드라도 이는 或 武人추기의 愚悍함을 制壓하기 어려움에 屬하였으나 再昨日의 擧措에 으르러서는 可히 變怪라 할지로다. 이미 登聞한 後에 萬若 軍法으로서 從事하지 않는 다면 이 어찌 本兵을 重히 하고 犯律을 嚴하게 하는 義理리요. 卿이 今日 開座에 威儀를 大張하여 所謂 閑良이랑 等 作傭한 諸人은 首·從을 莫論하고 또 人員數의 얼마를 莫論하고 일병 捉來하여 威嚴을 베풀어 盤 하고 首倡과 首犯人을 査出하여 仍하여 本營에 拘留하고 다음 習陣할 때를 기다려 衆人에게 보여 衆人을 警戒하고 限死 棍杖을 30度 執行하여 終身토록 絶島에 充軍하고, 次犯 諸人은 秋曺에 移送하여 照律하라 하였다. 曺草記에, 元犯 尹之益은 曺內에 保授하였으나 大典通編에, 邊遠에 充軍하는 者는 杖 1百에 流 3千里에 準한다하고 名例에는 3流는 같이 1等을 減하고, 爲從한 者도 1等을 減한다 하고, 大明律에 不應爲로서 事理 重한 者는 杖 80이라 하였으니, 이 律에 依하고, 次犯 閔道爀은 絶島로 充軍하되 罪 1等을 減하여 杖 1百에 徒 3年으로 하되 杖刑은 收贖하고, 閔重麗는 隨從으로서 1等을 減하여 杖 90에 徒 2年半으로 하되, 杖刑은 收贖하여 定配하기를 啓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알았도다 하였다. 還上 還上虛錄 肅宗 15年 戶曺判書 鄭載嵩의 所啓에 守令이 靈錄한 罪는 이미 定法이 있으나 反庫할 때 守令이 實數로서 報告하지 않으니 지금부터 虛錄한 守令과 反庫한 守令을 같이 勘罪하기를 請하였다. 임금께서 反庫는 虛錄보다 若干 輕하니 差別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므로 虛錄한 守令은 徒 3年 定配하되 永久히 除職치는 말고, 反庫 守令은 徒年으로 할 것을 永久 定式으로 하라 하였다. 39年 左議政 李 濡의 所啓에, 守令이 還上을 靈錄하는 者는 다 10年禁錮로 하고, 磨勘한 兼官과 發覺하지 못한 後官을 또한 同律로 함은 太重할 것같으므로 5年으로 減하고, 5·6石을 虛錄한 者를 또한 이 律로 施行함은 너무나 이 없는 것이므로 十石以下의 것은 모두 勿論하고, 後官이 發覺하지 못한 것과 兼官이 磨勘한 것은 아울러 從配하여 赦典에 분련하지 말도록 定式할 것을 請하였다. 國穀偸竊 肅宗 45年 備局의 奏達에, 洪州牧使 李廷濟의 上書에 依하면 무릇 色吏들이 國穀을 偸竊하는 者는 그 多寡에 따라 그 犯罪를 定하여 비록 死罪에 이른다 할지라도 斷斷 容貸할 수 없으나 이미 一罪로 處斷한 後는 可히 蕩滌하지 않을수 없는 形勢이니 이와 같이 定式하면 그 一族이 橫侵하는 患을 免하고, 國穀을 耗縮하는 弊 없을 터임으로 이에 依하여 擧行토록 함이 事宜에 合當할 것 같으니 他道에도 一體로 分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令에, 依準하라 하였다. 〔重補〕今上 6年 摠戎廳의 逋欠으로서 草記한 傳敎에, 續大典의 典守 穀物 虧欠條를 取見하건대 그 斷例에, 米 70石以上이면 該官은 削職하고, 庫子는 奴로 하고, 吏屬은 杖·流로 한다 하였으나 元來 監·兵使는 아울러 論罪한다는 文句가 없으니 생각건대 該營의 逋穀은 그 하나는 管城穀이요 또 하나는 禁倉穀인지라 城에는 城將이 있고 倉에는 倉監이 있음으로 律文中에 該官이라 云云한 것은 實로 이들을 말한 것이나 草記中에 이 1隸은 漏落을 免치 못하니 다시 論理를 갖추어 稟處하라 하였다. 曺의 草記에, 禁倉의 前書員 全尙義의 所逋는 140石이고, 管城所 前庫子 韓雲瑞는 53石, 韓龍瑞는 44石임으로 各各 杖 1百에 流 3千里로 照律하고, 前庫子 韓益良은 22石이므로 杖 1百에 徒 3年으로 照律하고, 前執事 최진한은 15石이므로 杖 1百을 照律하였으나 續大典에 該官 削職의 律은 奪告身에 比擬하는 例이며, 奪告身에는 杖刑을 執行하는 例가 있음으로 이로서 傍照하여 杖 1百을 贖錢으로 徵收하고, 前庫子 李命厚의 所逋는 43石零이므로 本律의 杖 1百에 流 3千里로 하되 萬若 이에 加等한다면 罪가 一律에 이르는 것이나 續大典에 庫子로서 米 70石以上은 絶島에 奴로 하고, 40石以上은 杖 1百에 流 3千里로 한다 하였으니 李命厚는 이에 傍照한 比律에 依據 加等하여 絶島에 奴로 하도록 施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衣하라 하였다. 〔重補〕12年 東萊府使 李敬一의 狀本에, 釜倉에 逋欠된 米木은 이제 다 받아 들였으나 孫處大·金鼎弘·安處宅·孫潤大·文錫豹등 諸吏에 이르러서는 恣意로 給倭할 物品을 偸弄하여 積年 作奸한 形狀은 진실로 罔赦한 罪이므로 至急一律로 施行하여야 한다 하였다. 曺의 回啓에, 道臣으로 하여금 具格하여 啓聞토록 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己酉年 道啓에 因하여 取招하여 結案하였다. 曺의 回啓에, 議政府에 報告하여 詳覆키로 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庚戌年 別諭內에, 대저 監守들이 40貫以上을 自盜하면 一律로서 處斷하는 것은 法典에 記載된 바이나 지금 萊府의 逋吏는 가장 적다는 者가 곧 潤大이나 270石의 米를 돈으로서 計贓한다면 1百貫이 넘으며, 法文에 比較하면 거이 3倍가 되거든, 하물며 國境要地에 下納하는 公米겠는가. 千石이나 2百石을 莫論하고 아울러 萊府에 殄首한 然後에 可히 邊上의 紀綱을 振作할 것이나 朝家의 用法은 徵一礪百이 貴한 바이며 반드시 殄滅한 뒤에 可히 威嚴을 세우는 것이 아닌지라 1人을 懲하여 百人을 礪하고져 한즉 將勢는 그 石數를 區別하여 가장 많은 者 1人만을 正刑에 돌리게 함이니 이는 그間에 首犯과 從犯이 있다는 말도 아니요, 또한 最少者가 一律에는 不犯한다는 말도아니며, 特히 5人中에 多少를 分揀하라는 말인지라, 處大의 1漢外에는 減死하는것이 或 大段한 失刑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5百石以上의 逋吏인 鼎弘과 處宅은 減死하여 濟州島에 奴로 하고, 2百石以下의 逋使인 錫豹와 潤大는 嚴刑 3次하여 永遠히 卿의 營奴에 屬하라 하였다. 〔補〕國穀換色 今上 14年 靈光郡守 沈有鎭이 常賑耗穀 3千石을 道臣에게 報告하여 作租하였으나 道臣이 惠廳에 移報를 붙이지 못한 것을 惠廳堂上의 所啓에 監司 鄭一詳을 緘問한다 하였다. 判付內에, 千包의 穀物을 換色함에 있어서도 朝廷의 命令이 있는 然後에야 비로소 擧行할 뜻을 筵稟하여 定式하였은즉 처음부터 移報도 없이 擅斷으로 輕率하게 許認한 前監司 鄭一祥은 爲先 罷職하여 敍用하지 말고, 該郡守는 該府로 하여금 拿問하라 하였다. 倉穀幻弄 今上 5年 本曺參議 徐鼎修의 所啓에, 摠戎廳 平倉의 還穀은 진실로 一大痼弊인지라 每番 분조할 때를 當하면 例를 倉底人으로서 懸保하여 出給하므로 京中의 無賴輩들이 閭巷의 稍實한 類를 招別하여 賭博하기를 종유하고, 賭博을 假托하고 稱貸를 거진 憑籍하여 保主와 締結하여 많은 石數를 받아내고, 甚至於는 姓名을 僞着하여 文券을 勒成하고, 그 봉조할 時期에 당도하여서는 本廳은 虛實을 不問하고 한번 조안에 記載된 바를 따라 徵收하므로 그 父兄을 囚禁하고 族黨에 侵及하여 1人의 作奸으로 10家가 被害되고 張 三이 수조한 것을 李 四가 납조하니 이것이 特히 그 大略인지라. 前參議 李義寬이 筵稟하여 申禁한 것이 嚴截할뿐 아니었으나 마침내 止息하지 않고, 대개 本廳의 봉조은 비록 作奸한 魁首를 잡았다 할지라도 置而不論하고 반드시 懸名된 사람을 調査하여 嚴重히 懲督하므로 都民이 本曺에 呼訴하는 者 項背가 相望하니, 此後 로는 本曺에서 元犯을 捉得하여 摠戎廳에 移送하여 還米를 다 받고 다시 本曺에 還付하여 法에 비추어 嚴勘함이 惶恐 事宜에 合當할 것임으로 廟堂에 下詢하여 處理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前後 筵席에서 屢次로 飭敎하였으나 弊는 오히려 그대로 있고 今年이 去年보다 더 甚하다 하니 어찌 아직 오지 아니한 해가 또 今年보다 더 甚하지 않을줄 알겠는가. 萬一 懲治를 痛加하지 않는 다면 舊習을 소거하기 어려울 것이니 所謂 平倉에서 作奸하였다는 倉屬과 保主人들은 明朝의 開座를 기다려 그 愚泯들을 종유한 罪를 일일히 嚴査하여 登對 稟奏하고, 從後 마땅히 嚴重 處治하여 平民에게 謝過하고, 摠帥도 溺職한 責任을 免하기 어려우니 從重하여 推考하고, 明春부터 爲始하여 다시 奸弊가 있으면 爾(刑)曺에서 들리는대로 嚴禁하고 또 該廳으로 하여금 無賴 賭博하는 類는 十分 금즙하고, 仍하여 이 뜻을 坊曲에 知委하여 한 사람의 百姓이라도 몰랐다든가 듯지 못하였다는 難息하는 일이 없도록 京兆 五部에 分付함은 이는 刑으로서 刑이 없기를 期함이며 또 收殺하는 政事와 弊風을 矯正하는 對策같은 것은 明日 大臣과 摠帥가 入待하여 稟處토록 함이 可하다 하였다. 本曺判書 李命植의 回啓에, 摠戎廳 新營書吏 이경위등과 庫直 姜謂濱등과 保主人 裵仁祥等은 삼가 傳敎內의 辭意로서 問目을 만들어 反覆 嚴問한즉 그 所謂 분조한 것은 한편 保主人等이 收納한 骨子에 따라 그 數量에 依하여 分給한 것임으로 書吏는 文書를 만들었을 뿐이며, 庫子는 倉庫를 열어 出給하였을 뿐임으로 受去한 사람의 誰某와 虛實의 與否는 實로 알수 없다 하나 旣是 該書吏와 庫子로서 保主人輩의 所爲를 모를 理 없을것 같고 保主人等은 한말로 辨明만 거듭하고 마침내 實吐하지 않으니 마땅히 用刑을 기다려 嚴訊으로 得請하며야 할 것이며 이미 登對하여 稟奏하라는 命令이 있었음으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에, 書吏와 庫子等은 그만 保放하고 保主人等은 그 數가 많음으로 다 가두기 어려운 形勢이니 그中 2百石以上의 것을 爲先 着枷 嚴囚하고 餘外 各人은 아울러 保授하여 釋騷하는 弊가 없도록 하고 草草한 供辭는 可히 憑信하여 酌決할 수 없으니 明朝의 開坐를 기다려 各人 들을 嚴問 取招하되 더욱 無良石數가 가장 많은 사람은 各別히 추핵하여 그 國穀을 幻弄하고 平民을 광혹한 罪는 一一히 遲晩을 받어 法에 비추어 重繩으로 處斷하라. 大抵 平倉의 조적이란 專혀 營屬의 接濟를 爲한 것임으로 경균취모하는 法을 오늘에 와서 비록 猝地에 없애기도 어려운 것이나 該營에서 萬若 분조할 때 願不願을 區別하고 實不實을 精選하여 口數를 헤아려 發給할 때 或 범연함이 없었더라면 금번의 弊端이 어떻게 發生하였을 것인가. 登豊한 남어지 京居民人들이 設令 다 受取를 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該營이 또 能히 事情을 審察하여 그들이 반드시 받지 않을 것을 안다면 어떠 形態로 든지 또 어찌 適切히 彌論할 方途가 없을 것인가. 該 營에서는 다만 倉屬과 保主人輩를 督責하기 일삼으니 저 倉屬과 保主人들의 이러한 擧措는 特히 事勢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니 그 倉庫에 保留한 石數와 分給한 石數, 應用한 石數는 原文書를 現納시켜 作傭을 頭目한 사람은 別般 調査하여 輸款을 기다려 從重 照勘할 것을 特別히 文字로서 語意를 構成하여 稟處하고, 書吏·庫直·保主人등은 다시 推問하라 하였다. 回啓에, 分給과 保留, 應用, 取耗等 文書를 現納시킨 즉 分給과 保留의 數는 傳掌의 重記中에 있고, 用下한 數는 事目冊 1卷을 取納하여 보니 本廳 需用의 不足數를 臨時로 取用한다 하였으나 元來 一定한 例가 없음으로 해마다 같지 못하니 이는 文籍를 按察하여 고핵하기 어려움으로 判付에 依하여 2百石以下는 아울러 그만 保放하고, 2百石以上과 비록 2百石 未滿이라 할지라도 作奸한 情狀이 綻露된 者는 일병 嚴囚하여 判付內의 辭意로서 問目을 만들어 究問한즉 許多한 保主人中 裵仁祥이 分俵한 石數가 最多 5百石에 이르고 그 幻弄과 作奸한 情狀도 節節이 綻露되었으며 崔鍾賢은 本來 倉民도 아니면서 保主에 冒屬하여 幻弄한 石數 또한 230石에 이르며, 曺壽澤은 戱具를 設置하여 雜類를 광혹시켜 幻弄한 穀數의 많은 것은 또한 3百餘石에 이르니 倉底居民은 모두 이 3漢을 罪의 魁首로서 注目하므로 威儀를 베풀어 嚴問하였으나 專혀 만환을 일삼음은 萬萬痛駭하고, 尹德善의 歇價에 이르러서는 돈을 주고 賂物을 받아 移錄하였으며, 李重根에 什一(1割)을 加棒하여 貧民에게 出給한 情狀은 이미 現發되었으며 分俵한 石數는 3漢에 比하면 差少한 것이나 그 用計와 作奸에 있어서는 참으로 첫째아니면 둘째요, 둘째아니면 첫째인지라 지금 嚴重 問訊下에서 비록 敢히 全然 隱諱하지는 못할지라도 마침내 實吐하지 않으니 모두 至極히 흉녕한 것 들이며 대저 保主人 37名은 그 罪狀을 論하면 全部作奸한 者이므로 石數의 多少와 情狀의 淺深으로서 區別하기는 不可하고, 石數는 비록 많다 할지라도 或은 情節의 差가 있으니 자못 混同하여 勘罪하기도 마땅치 못하고 情節은 이미 綻露되었으니 石數의 若干 적음으로서 容貸하기도 어려운 者이니 輩仁祥등 5人은 用刑을 기다려 엄핵하여 期於히 取服하고 그 나머지 32人은 臣曺에서 아울러 考律勘 處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이 各人들의 招辭를 보건대 石數의 多少와 罪魁의 誰暮는 모두 그만 두고라도 이런 구렁에 投跡하여 이미 保主人이란 3字의 名稱을 獲得하였음은 亂民아님이 없으며 國穀을 幻弄하고 平民을 誘惑함은 特히 第2의 일인지라, 朝家의 뜻으로서 말한다면, 裵仁詳이 반드시 元犯인 것도 아니요 尹從善·李重根이 또 반드시 隨從인 것도 아니며 邦憲으로서 論한다면 所謂 保主人이란 名稱을 가진 者들은 아울러 重律에 處하여 民情을 繹騷케 하였음을 謝過하는 것이 實로 徵礪의 方途에 合當할 것이고 또다시 생각건대 所謂 保主人은 自存이 窮難하지 않음이 없고 가난이 生을 營爲하지 못하는 무리로서 饑寒이 몸에 질려 糊口策에 沒頭되어 이러한 死中救生의 計略에서 나온 것일 터이며 萬若 犯行으로 因하여 本心으로 돌아섰다면 足히 可哀하다 할지언정 可怒할 일은 아닌지라. 지금 屢次로 取招한 結果 幻弄이니 誘惑이니 하는 種種이 같은 罪狀은 또 全然히 牢諱 수 없고 구태어 首位을 區別함에 이르러서는 輕重을 區分하여 處決함이 不可하지 않는 터이나, 罪人 裵仁祥은 擔當穀包數가 5百을 지나 다른 罪囚인다 가장 많음으로 律에 비추어 遠地로 流配하고, 該廳의 催科를 方張함과 적부의 磨勘을 끝마치지 못함을 먼저 勘罪, 處決함이 果然 저들의 嘆願에 適中함이 없을 것인가. 이는 該廳에 往復하여 草記로서 從長 稟處하고 崔鍾賢은 賊臣生의 婢族이요 逆臣 麟의 친겸이며 多年間 掖屬으로 隨行타가 마침 特敎로 因하여 汰罪하기에 이르렀 은즉 진실로 마땅히 奉頭鼠竄에 따른 餘暇를 갖지 않아야 할터이나 이에 敢히 京輦에 두류하여 이름이 奏御文案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 情狀을 推究한다면 더욱 萬萬痛惡한 일이므로 次律로 論함은 不可하니 仁祥으로 더불어 一體 照勘하고, 曺壽宅은 倉底의 居民들이 罪의 魄首로 注目하고 있으니 參酌하여 容恕하기도 어렵고 또 저의 供述을 보니 韓哥를 指示하여 鳳化의 重罪를 犯하게 하였으니 또한 兩罪囚와 더불어 同律에 處斷하고, 尹德善과 李重根은 卿等의 結語와 論列이 이에 이름으로 또한 白放할 수 없으니 아울러 等級을 나누어 參酌 處治하고 그 나머지 2百石의 諸囚는 어찌 반드시 全員을 流配하여야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은 明朝의 開坐를 기다려 다시 區別하여 笞·杖과 아울러 收贖하여 放送토록 하라. 大抵 平民과 亂民을 나로서 볼 때에는 다 같은 百姓이거든 하물며 所謂 亂民이란 것도 다 本是 亂民이 아닌 것이며 國家의 制度措置가 저같이 不當하여 京城 數里의 땅에 萬包의 穀物을 쌓어 춘조적을 外邑의 例와 같이하니 조그마한 平倉 一區에서 어떻케 그 原數를 다 나누어주리요. 그러므로 倉底는 다만 寒乞兒의 逋逃하는 수풀이 될 뿐 아니라 그 害가 城內의 貧戶와 富民에게도 미치게 되니 이러나 저러나 이 法만은 急速히 矯革한 然後라야 來後에 接踵되는 弊가 除去될 것이므로 後日의 決對를 總師가 登對할 때는 本倉의 還穀分數를 外邑에 移轉할 一款을 爛商 熟議한 後 稟處토록 하고, 本曺에서 枚擧한 判付內의 辭意는, 곧 該廳에 移文하여 本倉의 吏胥와 庫子等은 別로 更問할 것 없이 아울러 分煉하여 放送하고, 鍾賢등 4囚는 仁祥의 例에 依하여 決配하라 하였다. 官庫失火 顯宗 3年 領議政 鄭太和의 啓에, 倉庫의 物品을 盜出하고 故意로 衝火하는 者 있으나 守令의 失火는 不意에서 나왔음으로 從前에는 公罪로서 適用되었으나 先朝에 倉庫를 失火한 守令은 문득 徒 2年으로서 照律하였는지라 이러므로 下吏輩가 容或 그 邑 를 怨望하는 者 있다면 故意로 衝火할 後弊를 可處치 않을 수 없으며 陵官이 陵上에 失火한 것은 罪에 이르지 않는 것도 또한 이때문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지금부터 律은 本律로서 照勘하나 公罪의 收贖은 受敎로서 懸入하여 恒式함이 可하다 하였다. 〔重補〕 官倉失火 今上 15年 平安監司 심이의 狀本에, 柔院竹倉에 還分하고 남은 곡식 225石과 春 4石을 場火의 延及으로 全部 燒燼한 該僉使 尹進五 罪狀을 攸司로 하여금 稟處한다 하였다. 判付內에, 本道의 鎭餉을 釐正할 때 이猶阮에 있어서 일은 비록 適切한 處地에 屬한다 할지라도 그 또한 泛然히 보았으며 該鎭 還穀의 積弊를 道伯을 歷任한 말을 들으면 卿이 알것이니 該僉使의 拿來는 아직 좀 두고 爲先 저로 하여금 戶數에 比較하여 그 穀物을 計算하고 仍하여 弊되는 端緖를 說明하고 兼하여 球弊하는 方策을 俱伸하여 一一히 營門에 報告하게 한 後 論理를 갖추어 狀聞할 것을 該道臣에게 分付하고 이같이 申飭한 後 萬一 報告內容이 或은 實數가 明確하지 못하거나 或은 相違되어 鎭民으로 하여금 이 機會로 因하여 蘇醒하지 못하고, 鎭簿를 이때에 미치어 刷新하지 못한다면 이는 可謂 兩罪俱發인 것이므로 拿處하여 끝일 것이 아니라 마땅히 兵使로 하여금 拿致 嚴棍하여 곧 그 鎭에 充軍토록 이 뜻을 廟堂으로 하여금 嚴飭 分付하라 하였다. 犯贓 〔補〕 田結私用 肅宗 34年 戶曺判書金의 所啓에, 外方守令이 田結을 擅用한 者를 對律 處置함에 있어서는 杖 1百에 不過하여 마는 故로 官吏들이 懲畏하는 바 없으니 이는 還上을 虛錄하는 例에 比하여 勘罪할 것을 年分事目에 添加하여 外方에 頒布 示達하오면 반드시 實效있을 것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守令이 餘結을 私用함은 極히 可駭한 일이며 杖 1百의 律은 輕할 것같으니 還上을 虛錄하는 罪와 같이 處斷할 뜻을 頒布 示達함이 可하다 하였다. 承旨 兪命雄이, 幾負을 私用한 것으로 定罪하느냐 하였다. 戶曺判書 金이, 事目中 30負以上은 拿問하고 10負以上은 罷職한다 하였으니 이에 依하여 定限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30負以上 私用한 者는 還上을 虛錄한 律로서 定罪함이 可하다 하였다. 〔補〕 氷丁幻弄 今上 4年 漢城府의 啓辭에 氷庫書員 郭昌熙와 柴門庫直 鄭晩得은 秘密히 符同하여 氷丁 1백태를 官員을 欺瞞하고 尺文을 虛僞 發行하여 태가 20兩을 分配 偸食하였으니 莫重한 御供을 中間에서 幻弄한 當該 書員을 秋曺에 移送하여 律에 비추어 嚴刑하고, 該監의 官員도 그 責任을 免하기 어려움으로 拿處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傳敎에, 允許하고 各別히 嚴刑하되 官員은 拿問하고 말 것이 아니라 爲先 罷免하라 하였다. 〔補補〕 內入幻弄 今上 9年 備邊司의 草記에, 下敎에 依하여 長興에 紙物을 貢納하는 사람을 招致하여 委折을 査問한즉 그는 內入하는 名色이 戊戌年間에 始作되어 비록 今年으로서 말 할지라도 進排하는 數爻가 每朔 많으면 數百卷에 이르고 적어도 百餘卷以下는 않된다 하고, 院吏를 招問한즉 書史 李守完· 尹得運과 前書吏 李繼聃·廉出弘등이 다같이 今年 戶房으로부터 帖文의 下付를 圖得하였다 하니 內入은 眞重한 事體임에도 不拘하고 守完등은 다같이 院屬으로 敢히 內入한다 하여 圖帖 弄奸이 이같이 狼籍한 것은 法曹에 出付시켜 照律 嚴斷한다 하였다. 傳敎로, 알았도다 하고 紙物은 本是 微細한 物品이라 또한 公貨와는 다름으로 卷卷 張張에 間或 偸弄한 것은 이는 진실로 奸吏輩의 伎倆의 作用한 것이니 마땅히 淵魚勿察의 科에 付하여야 할 것이나 이 일은 그렇지도 않은지라 內入하는 物品을 憑藉하여 紙物 貢納하는 사람을 侵漁하여 半年間 會減한 것이 2千卷에 가까우며 所關이 클뿐 아니라 所犯이 輕하지 않으니 어찌 可히 懲礪의 擧가 없을 것인가. 하물며 院吏는 本來 仙吏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罪를 犯한 저들이 萬若 사람의 良心이 있다면 반드시 부끄러워 죽고져 할 것이며 이는 近來 承宣들이 能히 일을 일하지 못한 所致이니 어찌 下吏들만 責하리요. 今年 正月以後 當該承旨들은 一齊히 罷職하여 敍用치 말 것이며, 大抵 院中 所用인 啓辭紙를 內入하는 規定은 卽 古例이나 弊됨이 이에 이르니 이제 可히 繼續 準用할 수 없음으로 此後는 卷數로서 內入한 것은 該房에서 度支에 分付하여 取用하고, 啓草는 다른 品紙의 例에 依하여 書入하고 繼續할 필요없이 月末을 기다려 都錄으로 啓下할 것을 分付한다 하였다. 曺草記에, 律文을 取考한즉 續大典의 支供條에는, 濫徵한 者는 徒 3年이라하고 雜令條에는, 監守들의 自盜한 者는 杖·流한다 하였음으로 이律에 依하여 照律勘處한다 하였다. 傳敎에, 저들이 所爲는 비록 可攄가 없다 할지라도 院中紙를 取用함이 年前에 比하여 사배가 되니 院吏들이 이 內入의 定限없음을 엿보고 문득 幻弄할 數量을 增加하나 그들 本情을 推究하면 자못 아희에 가까운지라 아울러 嚴杖하여 放送하고 그 中 卷數가 가장 많은 者 1人은 定配하여 收贖하라 하였다. 受賂弄奸 英宗 10年 本曺判書 李廷濟의 所啓에, 日前 戶曺에서 銀貨를 바꾸기 爲하여 正木 450同을 白木廛에 出給하였드니 1漢이 나타나서 戶曺에 周旋하여 준다 稱託하여 賂錢 7百兩을 받았으니 이제 律을 適用함에 當하여 어떻게 하오니까 하였다. 戶曺判書 宋寅明이, 金在魯가 戶判 在職時에 關西木 5百同을 劃得하여 銀貨로 바꾸고져 할 때 郞廳 安允中이 白木廛에 交換하기를 請하므로 在魯 이에 聽許하였더니 이때 盧啓漢이란 者가 나타나 允中의 집에 往來하면서 廛人에게 揚言하여 果然 賂物을 받았음으로 允中이 自身을 辯明하기 爲한 計劃으로 戶曺에 狂狀하였다. 한다. 임금께서, 어떤律을 써야 마땅할 것인가 하였다. 廷濟는, 律文에는 杖 1百에 流 3千里라 하였으나 이律은 너무 輕하고 極律은 좀 지나칠 것 같다 하였다. 임금께서, 嚴刑을 3次하여 絶島로 定配하고 廛人은 秋曺에서 科罪함이 可하다 하였다. 假託徵索 今上 4年 黃海道 放未放에 對한 回啓에, 傳敎로 李禎奎 官長을 詐稱하여 民間을 討食함은 比할 수 없는 大罪인즉 輕易하게 放免키를 請함은 자못 百姓을 爲하여 弊害를 除하는 뜻이 아니며 이런 罪를 徒年으로 處刑함도 또한 法律適用을 詳審하지 못한 所致이니 律官을 本曺에서 科治하라 하였다. 本曺의 啓目에, 지금 京畿監司 李衍祥의 査啓를 본즉, 罪人 李禎奎는 進士라 詐稱하고, 或은 參奉이라 稱하고, 或은 官長의 至親이라 稱하여, 사람을 속여 討食하였으니 삼가 大明律이 詐假官條를 按察하건대 官職이 없는 者가 官職에 있다고 詐稱하여 民間에 要求한바 있는者는 杖 1百에 徒 3年이라 하고 萬若 官職에 現任中인 子孫弟侄家人의 總領이라 詐稱하여 按臨部內에서 救爲한바 있는 者는 杖 1百으로 하되 萬若 得財한 者는 아울러 贓物을 計算하여 竊盜에 準하여 重罪에 따라 論한다. 하고 ,同律의 竊盜條에는 得財 1貫以下는 杖 60이라하고, 名例에는 그 罪가 俱發한 者는 重罪에 따라 論한다 하였으니 當初 律官이 다만 詐稱만을 말하고 討食을 말하지 아니한 것은 能히 병론하여야 함을 參考하지 못하고 스스로 擬律 不審한 科에만 돌림은 진실로 痛駭함인지라, 罪人 李禎奎를 前記 律文에 依하여 仍하여 流配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뜻은 或 討食한 罪는 詐稱과는 差가 있다 할 것이나 向日 仍하여 流配할 것을 判下한지라 이 回啓를 보건대 合하여 斟量할 길이 있으니 放送하라 하였다. 今上 5年 漢城府의 啓에, 所謂 修理廳 儒生이란 李命銓은 卽 義宮馬直東彦의 아들로서 宗班의 後裔라 假稱하고, 修理廳에 投托하여, 有司의 任務를 얻어 白木의 重杖을 私造하여 各色邸人을 威脅하여 賂物을 徵索하니 秋曺로 하금 嚴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近來 國法이 비록 掃如하다 할지라도 內侍의 私奴로서 宮房에 使役하는 者璿派(國族)라 僞稱하여 儒生으로 託名하고 甚至於는 徒黨을 모아 廳을 設置하여 疏章을 올리기를 圖謀하고 法外의 刑杖을 私造하여 平民을 못살게 하니 流配하는 刑典을 어찌 이 기슬같은 무리에 施行하리요. 李命銓은 絶島의 本役에 仍하여 奴로 하라 하였다. 徵 債 公債 肅宗 15年 戶曺判書 柳尙運의 所啓에, 朝家에 일찍이 6百兩以上의 公債가 있는 者는 當該 衙門의 奴로 만드는 것이 定式으로 되어있으나, 近來奸惡한 弊端이 날로 불어낳어 奴隸되기를 擊錚 自願하는者 있게 되니 이들은 本來 賤人이라 除籍하여 公奴된다 하드라도 저들에 있어서는 損害될 것 없으며 法文으로서 말할 것 같으면 마땅히 監守自盜의 律로서 論罪하여야 할 터이니 大臣에게 下詢하여 處置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左議政 南九萬은, 한사람의 徵債로서 族屬에게 侵及함은 그 弊가 甚大한지라 先朝甲辰年間에 臣이 諫長으로 있을 때 이로서 陳啓하여 公債를 償還치 않는 者는 親父子 外의 다른 族屬에게는 侵及하지 말고 萬若 償納할 形勢가 없으면 除籍하여 奴婢로 만들 것을 定式 立法하겠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들은 爲先 妻子와 아울러 遠地의 奴로 하고 此後로는 監守自盜의 律로서 處治할 것을 定式 施行하라 하였다. 22年 備邊司의 啓에, 平安監司 李濡의 啓本을 본즉, 管餉의 負債人을 該曺로 하여금 이를 除籍하여 官婢로 만든다 하였으나 從前 出債하는 무리들이 監色에게 行賂함은 이에 常習되어 給債한 後 비록 償還하지 않드라도 조금도 그들 身上에는 害가 없음으로 詳審하지 아니하며 許多한 逋欠이 이에 緣由되어 있으니 此後 負債人을 論罪할 즈음에는 當該 監色을 減 1等으로 論罪할 것을 啓本에 依하여 定式할 뜻을 回移함이 如何하오리까 하고 請하였다. 私債 肅宗 22年 備邊司의 啓에, 前日 漢城府에서 債務를 履行시키기 爲하여 債務者를 府內庫間에 拘留함이 많다 하므로 該郞官은 招致하여 朝廷命令의 違越함을 問責하여 卽時 釋放토록 하였드니 日前 또 30年前 私債를 外上값이라 하여 訴狀을 올려 推尋한다 하니 大凡 債務를 履行치 아니한者 그 情狀은 可惡한 것이나 朝家에서 이미 百姓들의 搔擾를 念慮하여 받지 못하게 하였은즉 30年前 4百餘兩의 私債를 外上값이라 하여 그 아들에게 刻徵함은 진실로 可駭한 일이며 이를 그대로 둔다면 朝家에서 小民들에게 公信을 보일수 없는지라 漢城府의 當該 堂上官과 郞官은 罷職하기를 請하고 또한 爭訟한 사람은 그 罪가 重하면 곧 典獄에 囚禁하고, 輕하면 可히 閭閻에 知家하고, 庫間에 拘留함도 또한 甚히 駭然한 일인지라, 漢城府外 刑曺等 다른 衙門에서도, 拘留하는 法이 많다하니, 아울러 罷職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로, 依允하였다. 44年 右議政 李 의 所啓에, 民間의 疾苦를 비록 彈擧하기 어려우나 百姓을 富裕하게 하기 爲한 生殖의 道가 甲利에 이르러서는 너무 지나친지라, 예로부터 貨財의 生殖이 스스로 定式이 있어서 官貨는 米布 銀錢을 莫論하고 什一生殖(一割) 利潤으로 하고, 民間은 米穀에 있어서는 什五生殖(5割), 錢布에 있어서는 什二生殖(2割) 利潤으로하되, 萬若 이를 遞越할 때에는 官吏에 대하여는 制書有違를 律로서 論罪하고, 私家에 대하여는 杖 1百의 律로서 施行하여야 貧民들이 可히 支保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依하여 施行하라 하였다. 英宗 42年 傳敎에, 公債의 年限은 15年, 私債의 年限은 20年으로 하되 當事者가 現存하지 않는 것은 아울러 蕩減함이 可하다 하였다. 錢貨 鑄錢 今上 3年 正言 李殷模의 所啓에 因하여, 前後 鑄錢監官을 推問하니 監官 朴敏行의 招內에는, 乙未年봄 泰淵이 御將이 되었을때, 鑄所의 돈이 25萬6千7百90餘兩이나 所鑄한 것은 43萬兩이 되며, 本錢 및 炭松明價와 匠工의 料布等 雜費를 除하고 剩餘錢이 10萬兩이 되었으나 8萬兩은 利條로서 備局에 納付하고 나머지 2萬兩은 監官 2人에게 各各 7百兩씩 帖給하고 書員 3名과 庫直 2名에게 各各 5百兩을 帖給하고, 그 나머지 1萬6千餘兩은 泰淵이 私用하였으며, 丙申年 여름 李柱國이 總戎使가 되었을 때 鑄所의 돈이 38萬餘兩이 었으나 乙未年의 未收錢이 17萬兩이고 李柱國의 上下錢이 6萬8千1百80餘兩이며, 善復이 御將되었을 때 上下錢이 3萬4百90餘兩이며, 泰淵이 炭松明과 雜物價로서 6萬2千9百80餘兩을 預下하고, 餘在鐵價 5萬餘兩과 應下雜費를 控除한 實錢이 26萬餘兩이었으나 今審에 新鑄한 돈 31萬 1千兩을 먼저 받고 그 남은 17萬兩은 各處의 貸金을 還報하였으며, 11萬5千3百餘兩은 舊典을 交換코져 匠手에 出給하여 11利로서 마땅히 還捧토록하여 現在庫 2萬4千餘兩은 있으나 利條의 7萬餘兩은 아직 收捧치 못하였으며, 年前 鑄錢할 때는 15爐에 不過하므로 工匠도 많지 않고 供饋하기도 甚히 容易하였으며 鐵의 多少를 莫論하고 官으로부터 全量을 鑄錢하였으나 近來에는 爐數가 漸漸 많어 50爐에 이르고 匠工의 役人도 千餘名이 되니, 許多한 役人을 供饋할 길이 없으므로 每日 每爐에 1稱을 工匠等處에 發賣하여 口錢 2兩과 本價와 11利錢(1割)利錢을 收捧하고 餘數는 全部 役人의 供饋로 하니, 비록 鐵을 發賣하는 式例로서 이를 計算하드라도, 每百兩에 利錢이 마땅히 28兩이 되는지라 泰淵은 이때의 剩餘 利錢만 하드라도 果然 10萬兩이 되었으나 2萬兩은 私用키 爲하여 除하여 두고 다만 8萬兩을 當局에 納付하므로 每百兩에 利錢이 20兩에 未滿된 것은 實로 이에 말미암은 것이며, 今審은 貿鐵한 價格이 26萬餘兩이므로 여기서는 13利(3割)를 利潤하였고 銅鐵을 捧上할 때에 이르러서는 監官等處에서 每稱에 3錢의 例債가 있다 하므로 工匠輩는 이를 朔錢이라 하여 每朔에 1百兩을 備給하므로 또한 捧用하고 있으니 例債니 朔錢이니 함은 莫論하고, 前處 所用한 것이 거이 數千兩의 많은 돈에 이른다 하고, 監官 朴根發의 招內에는, 貿鐵한 數量에 있어서는 倭銅이 2千餘稱, 含錫이 1千8百餘稱, 鉛鐵이 1千4百餘稱 ,鄕銅 1千餘稱이며 所鑄한 돈은 64萬餘兩이나 36萬兩은 賑廳에 還納하고 10萬兩은 舊錢을 交換하여 5萬兩은 鑄所에 실어오고, 5萬兩은 실어다 張志恒의 겸인 朴象集家에 두었다 하고, 書吏 金文昌의 招內에는, 鑄所의 各色銅鐵은 壬辰年부터 南倉에 貿易하여 둔 것이 銅鐵이 2千餘稱, 張志恒이 貿易한바 동철이 1千餘稱, 含錫이 1千8百稱, 鉛鐵이 1千4百餘稱이며 所鑄한 돈이 64萬餘兩이었으나 36萬兩은 惠廳에 還報하고, 3萬兩은 守禦廳의 舊錢과 交換하고, 3百80兩은 匠手의 役價를 支給하고, 8千兩은 禁營에 還納하고, 3千兩은 訓局에 貸送하고, 1千兩은 摠戎에 貸送하고, 5千兩은 李光赫에게 出給하여 銀貨 3萬4千6百80兩을 貿易케 하고, 3處屯價 및 禁營에 貸來한 銀價로서 8千2百兩과 御廳騎士馬의 太價로서 9萬9千40兩을 軍色에 移送하였으나 어디에 使用하였는지 알 수 없으며 10萬兩은 利條로서 備局에 納付하고, 4百兩은 監色에 帖給하고, 10萬兩은 惠廳의 舊錢과 交換하여 5萬兩은 鑄所에 실어오고 5萬兩은 張志恒의 人 朴象集家에 運搬하여 두었다 하고, 書吏 安命鉉의 招內에는, 丙申年 炭松明價 3萬2百兩을 吳漢柱에 出給하고, 口錢 3千20兩은 泰淵이 直接 區處하므로 監色들을 干預할 수 없었으며, 各色鐵을 捧上할 때 每稱에 例債 3錢식을 모든 監色과 더불어 分用하고, 物力錢은 30萬餘兩이나 所鑄한 돈은 41萬5千兩이며, 舊錢을 相換한 13萬兩은 均廳에 還納하고, 9萬兩은 賑恤廳에, 2萬兩은 兵曺에, 4萬7千兩은 禁營에, 2萬兩은 賑恤廳에, 6千3百兩은 備局에 納付하고, 利條 8萬兩은 監色들에게 帖給하고, 4千餘兩은 泰淵이 私用하였고, 1萬7千餘兩에 대하여는 每百兩에 利條가 20兩에 未滿되었으니 泰淵이 萬若 私用함이 없었드라면 13利는 洽足하였을 것이나 泰淵의 私用과 監色以下들에게 帖下한 所致이며 어찌 敢히 其間에서 幻弄하리요 하고, 劉太亨의 招內에는, 倭銅을 所貿한 價額 5萬餘兩을 次知가 上下하였으나 元來 情債로서 捧上함이 없었음으로 每稱에 3錢식을 例捧하여 監官과 員役들과 더불어 依例 分食하고, 炭松明價3萬2百兩을 出給할 때에는 口錢이 3千20兩은 되었으나 泰淵이 直接 區處하므로 吏屬들은 敢히 干預할 수 없으며, 鑄錢하는 物力을 畢鑄한 後 還納과 區處等事는 命鉉이 이미 直陳하였으니 命鉉의 招內와 別로 異同이 없다 하고, 庫直 趙聖佑의 招內에는, 各色銅鐵의 價額은 次知가 支給하는 바이나 本來 情債가 없음으로 捧上할 때 每稱에 3錢식을 例捧하여 勘色이하의 員役들과 더불어 分食하고, 炭松 明價를 出給할 때의 口錢 3千餘兩은 泰淵이 直接 區處하였음으로 알 수 없으며, 物力의 本錢도 能히 記得할 수 없고, 新鑄錢 41萬餘兩을 各處에 還給한 後 利條錢 8萬兩은 備局에 還納하고, 監官以下에 帖給한 3千9百兩과 泰淵이 私用한 1萬7千餘兩은 文書의 區處를 仔細히 알 수 없다 하고, 徐有國의 招內에는, 癸巳年에 趙聖佑와 더불어 같이 庫直이 되었으며 聖佑는 이미 直陳하였으니 그 招辭와 조금도 異同이 없다하니, 鑄錢所의 前後 幻弄하여 偸竊한 사실을 箇箇 嚴訊하고 反覆究問하여도 半呑 半吐하여 마침내 直招 아니함은 萬萬 痛惡한지라 加刑 得情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本事件은 그 事實을 論한다면 至極히 汚穢하므로 屑屑이 멸구하고싶지 않으며 그 犯行을 말 한다면 크고 큰 贓盜이므로 또한 심심이 緘口할 수도 없으니 위로부터 어떤 말을 끄집어 내는 어떤 證據를 잡아내어 反覆 發問하여 期於히 輸情토록 하고 그 銖한 幻弄과 記籍한 那와 偸竊한 委折 等事의 마땅히 물어야 할바는 자못 勝言하기 어렵고 오직 刑典을 맡은 臣下들이 意見을 내어 或은 刑訊, 或은 杖刑으로 究 하여 實情을 確認함에 있는 지라, 原供辭는 짐짓 明白하지 못하니 判付는 이에 依하여 다 알았으니 이미 물은 各人은 다시 取招하고 아직 묻지 아니한 各人은 刻期 發捕하여 卽刻 捧供하라. 大抵 저들은 비록 罔赦할 罪 있다 할지라도 朝廷에 萬若 恒泰等賊이 없었다면 저들이 生臆을 放肆함이 어찌 이에 이르렸으랴.지금에 와서 兩賊은 이미 먼저 物故(死亡)하였음으로 贓律을 追施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진실로 痛駭한지라, 저들에 있어서는 무엇을 足히 말하겠는가. 各人等을 한결같이 刑訊하다가 마침내 徑斃하게 된다면 자못 審恤하려는 뜻이 아니니 이미 加刑한 類는 辜限을 기다려 加刑하고 또 已前事는 오히려 論할것도 없으나 今審 鑄役할 즈음에 監官과 色吏들이 徘徊 顧望하고 舊習을 改悛하지 않는 者 더욱 頑惡이 極한지라, 朴敏行은 이미 百罪가 俱發 되었으나 또 近日 鑄所의 下吏들 中에 또 처음부터 끝까지 符同한 者 있으니 그 罪狀을 推究하면 敏行과 더불어 將次 同一할수 없으니 敏行外에 此漢들은 特別히 嚴刑을 加하여 國法을 嚴正하라 하였다. 朴根發에게는 鐵物을 出納할 때 高稱을 받아 輕稱으로 分配하니 每稱의 剩餘가 半更招斤이 되므로 7千4百餘稱에 剩餘가 1萬1千1百斤이 되고 이로서 所鑄한 돈은 志恒이 全部 私用하였으며, 發賣하는 鐵은 每朔 每爐當 監官과 色吏에 各各 2兩식 支給하니 50爐로서 말한다면 그 數가 百兩이 된다하고, 閔百孝의 更招에는, 鑄錢을 맡친 後 備局에 納付한 利條 10萬兩內 3萬兩은 鑄所에서 直接 戶曺에 送達하고, 餘錢 7萬兩과 9萬9千兩은 果然 逢授하여 或은 應下에 使用하고, 或은 策應에 送付하였으며 其餘 3萬8千兩은 或은 象集家에 露積하고 或은 私庫에 入峙하여 혼자서만 出納하여 干預하지 못하게 하므로 그 用處는 알 수 없다 하고 安命鉉의 刑推한 更招에는, 乙未年 鑄所의 돈이 31萬兩零이었고 所鑄한 돈은 45萬8千餘兩이었으나 이를 잘못 41萬5千兩으로 納招하고 泰淵의 私用한 돈이 4萬3千餘兩이었으나 잘못 1萬7千餘兩으로 納招하고, 炭松 明價를 上下할 때 果然口錢이 있었음으로 丙申年 炭松 明價 3萬2百兩을 吳漢柱에게 出給할 때 口錢 3千20兩을 泰淵이 直接 私用하고 鑄錢을 끝마친 後 舊錢을 交換한 것이 13萬兩이며, 什一의 利로 1萬3千兩을 泰淵이 또한 私用하였으며, 저의가 得食한 것은 乙未年 鑄錢할 때 3個月分 工匠에 例給하는 돈 3百兩과 銅鐵을 捧上할 때 3錢條의 1百20兩과 注末 값이 2百兩이며, 鑄錢을 마친 後 泰淵이 帖給한 것 5百兩과 別途 帖給한 것이 2百兩가량이며, 鑄錢할 때 3個月分 工匠에 例給하는 돈 3百兩과 銅鐵을 捧上할 때 3錢條의 90兩과 注末 값이 60兩이었으며, 이밖에 工匠들을 私饋한 것은 餘盤床 2件이며, 鐵物을 發賣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어느 때부터 創作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前判書때 發賣한 鐵物의 利가 官鑄의 利에 不及함으로써 果然 節目을 만들어 革罷되었으나 今番 鑄錢할 때 50爐의 役軍이 자못 1千50名이 지남으로 이들을 供饋 하기도 어려웠고 또 年前에는 鐵價가 아주 헐하므로 匠手들의 物主를 募得하여 鐵物을 貿易할 때 鑄鐵을 끼워서 그 不足함을 補充하였으나 近來에는 鐵價가 倍增되어 匠手들이 支當할 수 없어 敗亡한 것이 많음으로 匠手들이 堂上에 呼訴함으로써 發賣하게 되고 그 남은 利를 取하여 한편 不足함을 補充하고 한편 雇價를 充當하였으며 비록 鑄所의 文書를 본다 할지라도 蔘價 3萬兩을 直時 江界主人에게 出給하였으니 累鉅萬의 公貨를 어찌 無端히 預下할 理 있으리요. 이는 軍門의 囑託을 받아 出給한 것이라 云云하고, 朴敏行의 刑推한 更招에는, 乙未年 鑄錢時에 舊錢을 交換한 13萬兩에 什一의 利인 1萬3千兩을 泰淵이 私用하였다 한다.本曺의 啓目에, 各年 鑄錢時에 監官과 色吏들中 前後 가장 많이 幻弄하고 偸竊한 者는 卽 朴敏行·安命鉉·蔡德純·金鎭國 4漢이며 그 罪狀을 論하면 可謂 1이로되 2요 2로되 1인지라 前招中에는 罪過를 掩避하고 訊問을 不服하여 半은 먹음고 半은 吐하였으나 다시 刑推한 밑에 이제 겨우 納招하는 것은 情狀이 더욱 巧惡하므로 刑訊을 더하여 情狀을 얻도록 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丙申年以前에 符同하여 作奸한 類는 罪가 진실로 赦할 수 없는 것이나 이러한 志恒과 泰淵이 없었다면 어찌 이러한 무리들이 있으리요. 朝家가 이러한 일에 있어서 昧爽以前에 屬한 것은 每番 勿問하는 科에 두었으니 元犯은 이미 物故된 後이며 此漢等만 홀로 重典을 施行함은 不可하고 今番 추핵하는 뜻은 또한 그 來歷을 盤問함에 不過하니 丙申年以前 鑄所에 干連된 諸囚는 1倂 放送하고 今番 鑄錢監官 朴敏行과 下吏 安命鉉은 다 己前의 鑄役으로 부터 今番 鑄役에 이르기 까지 或은 首尾로 作奸하고 或은 始終을 잘 알고 있은 즉 이는 참으로 令後에 故意로 犯行한 者이니 이 兩漢만은 從重 勘律하라 하였다. 私鑄錢 肅宗 4年 左參贊 吳廷緯의 所啓에, 私鑄한 者는 一罪로서 論하나 捕告한 者의 論賞을 甚輕하니 請컨대 從重 論賞하여 捕告하는 길을 넓여야 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私鑄한 者는 一切 嚴禁하고 捕告한 者는 捕賊과 같이 一體로 論賞함이 可하다 하였다. 21年 領議政 南九萬의 所啓에, 盜鑄하다 現發된 것은 可히 대당율에 依하여 處斷하지 않을 수 없으나 近來에 들으니 盜鑄하다 現發된즉 匠人은 死刑에 處하고 奉足은 定配한다 하므로 비록 匠人일지라도 다 奉足이라 僞稱하여 死罪를 免하게 되니 請컨대 다시 事目을 定하여 匠人과 奉足을 莫論하고 不待時處斬을 一體 대당의 律에 依하고, 捕告人의 論賞도 또한 대당의 一例에 依하여 施行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依하라 하였다. 22年 本曺判書 閔鎭長의 所啓에, 일찌기 大臣의 陳達에 因하여 盜鑄한 罪人은 首犯과 從犯을 莫論하고 다 1罪로서 論斷할 것은 定奪되었으나 接主人의 論罪도 可히 定式이 없어서는 않된다 하였다. 領議政 南九萬은, 接主人은 반드시 盜鑄한 匠人으로 더불어 그 利益을 共分할 터이니 마땅히 一罪로서 論斷하여야 한다 하였다. 判府事 申琓·戶曺判書 李在華, 大司憲 崔錫鼎은 다 말하기를, 匠人으로 더불어 1體 論斷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閔鎭長은, 무릇 罪의 未遂인 것은 다 本罪의 1等을 減하되 홀로 盜鑄에 있어서만 아울러 一罪로서 論斷함은 過中할 것 같다 하였다. 左議政 柳尙運은 이미 爐冶를 設置하였으면 僞造印을 未成한 者와 더불어 다름이 없으나 爐冶 以外의 器具를 다만 鑄錢에만 使用하고 다른 鑄物에는 使用하지 않는 者를 萬若 現捉한다면 鼓鑄 與否를 莫論하고 未成으로 論함은 不可하다 하였다. 임금께서, 奸計를 防止하는 道理는 可히 嚴하지 않을 수 없고, 法을 세우는데 可히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爐冶를 設置하였더라도 鑄成에 未及한 者는 次律로서 論斷하라 하였다. 同年 傳敎로, 日前 筵中에서 大臣들이 私鑄錢한 接主人은 一罪로서 處斷할 것을 請하였으니 私鑄한 罪 비록 重하나 殺人 强盜보다는 더할 것이 없으며 비록 殺人으로 말 할지라도 좇아서 加功한 者는 絞刑에 處하고, 加功치 아니한 者는 減等하는 律이 있으니 接主人을 死律로서 論함은 마침내 太重한줄 안다 하였다. 閔鎭長이, 聖敎 諄諄하고 欽恤하는 뜻과 好生하는 德은 至極하온지라 所謂 次律이란 또한 處絞는 減死와는 다름이 있으니 어떻게 하여야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임금께서, 殺人에 加功치 아니한 者는 死罪에 이르지 않으니 接主人이 同謀하여 利益을 分配한 形跡이 明白하여 疑心이 없는 者는 一罪로서 論斷하고 그렇지 않는 者는 減死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同年 私鑄에 對한 律을 定하라는 敎命에 天下의 일을 지나치게 決하게 한다면 도리어 病敗가 있는지라 日前 筵中에서 私鑄를 舍置한 者의 刑律을 定함에 있어서 諸臣의 所陳이 同一하지 못하고 大臣들은, 마땅히 死罪에 處하여야 한다하니, 大抵 殺人을 論한다면 반드시 加功한 然後라야 死罪에 處하는 것이니 私鑄한 者는 이미 殺人으로서 死罪에 論하고 舍置한 者 또한 死罪에 處함은 너무 重함이 없을가, 다시 次律로서 定하고 同謀하여 利益을 分配한 者는 一罪로서 論斷하라 하였다. 23年 黃海監司 李德成은 啓本에, 罪人 金田은 物故한 罪人 李化永과 同謀하여 私鑄한 罪狀은 이미 結案되었으나 事目에 私鑄한 者는 不待時 處斬하고 接主人이 同謀하여 利益을 分配한 者는 次律로서 論斷한다 하였으며 指告人의 論賞事는 該曺로 하여금 稟處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金田等의 所犯은 이 私鑄에 屬한것이나 今般 이런 等類는 일병蒙放하였으며 이도 또한 4月 22日 赦前의 일인즉 一生 一死를 京內 京外에 異同이 있어서는 않되니 金田 및 接主人 尹咸等은 아울러 放送하고 指捕人의 論賞事는 定奪에 依하여 安徐(容恕)하라 하였다. 英宗 13年 私鑄罪人 李東柱를 結案한 後 다시 本道로 하여금 査啓토록하였다. 忠淸監司 尹敬龍의 狀本에, 尹德化·朴檢山·金男伊는 다 이미 逃亡하고 東柱는 本來 鑄工이 아니며, 다만 德犯의 敎誘로 因하여 空舍의 품팔이로 吹火에 助力하였을 뿐이니 삼가 先朝 丙子 3月의 受敎를 按察하건대 私鑄錢의 接主人과 同謀하여 利益을 分配한 者는 一罪로서 論하고 그렇지 않는 者는 次律로 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丙子 8月의 受敎에는 私鑄錢에 隨從한 것은 參恕할 길이 없지 않다 하였으며 8月의 受敎로서 본다면 東柱는 實로 이 貧賤한 사람이므로 一分可恕할 길이 없지 않으니 該曺로 하여금 參量 稟處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本曺의 粘目에, 判付內에, 이미 隨從이라 한다면 마땅히 受敎를 따라야 한다. 또 更査한 中渠의 供辭에도 또한 矜惻함을 깨닫지 못하니 參酌하여 島配로 하고 所謂 德化는 本道에 分付하여 譏捕勘律하라 하였다. 唐錢 今上 3年 門外 床廛人 林重新과 米廛人 閔重瑗이 唐錢을 潛買하여 換錢取利하다가 捕廳으로 부터 本曺에 移送되어 嚴囚 구핵하니 林重新과 安州人 金遠聲이 符同하여 遠聲으로 하여금 唐錢을 買來게 하여 重瑗에게 移給하고 許多한 米商에게 散給하여 換錢으로 剩餘利益을 取得하였다. 대개 義州人 申處坤·邊得元이 柵에 들어가 買來하여 安州人 金弘肇·柳天采에게 轉賣하고 弘肇와 天采는 또다시 金遠聲에게 賣渡하였으나 申處坤등은 前부터 唐貨를 交易할 때 鑄器의 所用으로 唐錢을 買來하여 本府에 納稅하고, 근으로서 斥實하였으나 처음에는 禁止 物品이 아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灣府에 行關하여 節目을 取考한즉, 唐錢百斤은 銀 30兩으로 끊고 收稅하는 뜻이 節目에 記載되었으니 禁止物品이 아님은 可히 알 수 있었다. 同年 10月 傳敎로, 唐錢事로서 被械한 者 10餘名의 多數에 이르고 滯獄된 것이 또한 5朔이나 오래도록 이른다 하니 今日內에 決放하되, 元犯 金遠聲과 林重新은 私鑄錢인 情을 알면서 買得하여 使用한 律로서 杖 1百에 流 3千里로 하고, 閔重瑗은 隨臣으로서 杖 1百에 徒 3年으로 하고, 換錢한 米商 11名은 官을 詐欺하고 비밀히 1貫以下를 取財한 律로서 各 杖 60으로 하고, 始買한 義州人 申處坤과 邊得元은 鍮器匠에게 賣渡하지 않고 弘聲等에게 賣渡한 罪는 不應爲事理重律에 依하여 各, 杖80으로 하고, 中間 買賣한 安州人 金弘肇와 柳天采等은 鑄器를 假託하여 買此 賣彼한 罪는 該道에서 아울러 杖 1百에 流 3千里로 하라 하였다. 邊地行錢 英宗 42年 領議政 徐志修의 所啓에, 昌城의 行錢罪人 張太範은 이 一律에 屬한 것이나 지금 從輕 勘律할 것을 下敎함은 實로 好生의 德意에서 나온 것이나 이제 萬若 從輕한다면 邊禁이 蕩然할가 竊恐하므로 이를 具格하여 結案치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께서, 領相의 所奏는 可謂 法대로 執行한다는 것이나 곧 一律를 施行함은 過한지라 特別히 1等을 減하여 海島로 定配하라 하였다. 銀銅 造 銀 肅宗 18年 領議政 閔 熙의 所啓에, 銀貨를 假鑄한 律을 大臣에게 收議하기를 敎命하온지라, 律文에 楮貨를 僞造하고, 銅錢을 私鑄한 者는 다 一罪로서 論斷한다 하였은 즉, 銀貨를 僞造함은 더욱 重할 것 같다 하였다. 本曺判書 睦昌明은, 仁祖朝에, 銀匠 池沼龍 銀貨를 假鑄함으로써 梟示籍沒에 까지 이르렀으나 일찌기 令甲을 制定치 않았음으로 文書로 可考할 수 없다 하였다. 임금께서, 銀貨를 假造한 罪는 銅錢을 私鑄함에 比하여 더욱 重하니 不待時 處斬이 可하다 하였다. 英宗 39年 京人 朴務行·林震華·李晦根·河有福·朴成逢등이 서로 符同하여 天銀에 鉛銅을 混雜하여 7·8星丁銀을 鑄成하여 前後 所鑄한 것이 合하여 6千餘兩이 되었으나 倭銀이라 假稱하여 行用하였음을 本曺에서 推問할 때 다 自服한지라, 判付內에, 무릇 物貨의 操從을 史記로서 본다면, 國家에 있고 百姓에 있는 것이 아니며, 我國에서 所用하는 銀은 광은에 不過하였으나 所謂 7星이니 8星이니하는 卽 倭銀을 이들이 敢히 貧利할 計巧를 내어 이 3百年 所無한 事件을 犯하였으니, 이 銀이 萬若鴨綠江 以北에 流入한다면 그 國家에 辱됨을 勝言할 수 있으랴. 이는 決코 昨年의 所爲도 아니며, 造用한 것이 決코 6千餘兩에 끝친 것이 아닐 터이니 施威하여 嚴問 更招하라 하였다. 判符內에, 지금은 다시 可問할 端緖도 없고, 이미 律文이 있으니 일들의 部類를 그 萬若 參酌한다면 이는 國家에 律이 없는 것인지라, 首謀한 物主 朴務行과 造人 林震華·銀廛人 李晦根·造銀匠 河有福·朴成逢 5漢은 곧 棒招하여 結案한 後 正法하는 곳에 모든 市民을 모아 律에 依하여 正法하라 하였다. 〔重補〕銀銅私採 今上 11年 戶曺의 草記에, 銅鐵을 私採하는 弊端은 特別히 禁斷치 않을 수 없는지라, 萬若 朝家에서 關由한 것이 아니고, 私私로 店鋪를 設置하여 採取하는 것을 能히 禁斷하지 못한 道伯과 守令은 마땅히 아울러 重勘하여야 하므로 이로서 諸道에 申飭한다 하였다. 傳敎에, 私店의 弊를 可히 勝言할 수 있으랴. 遊食하는 무리들이 逋藪를 作爲함은 모름직이 別般의 甲令이 있으니 牟利輩의 冒犯을 막아야 할 것이며 비록 公私에 共히 利益된다 할지라도 오히려 任他할 수 없거든 하물며 그 大害가 小益보다 더 甚하랴. 此後는 度支衙門에서 擧條를 내어 行會하는 關文이 않인 外에는 營邑에서 그 開店을 放任하여 雜類를 聚集하는 者가 發見되는 대로 道伯은 制書有違의 律로서 施行하고, 地方官은 徒配 또는 禁錮 3年으로 할 것이며, 品質을 看色한다는 等事를 稱托하고 公私採한다면 이를 禁斷하지 못한 道伯과 地方官은 右律에 准하여 勘斷하고, 仍하여 本道에서 京司의 分付를 杖擧하여 事實을 狀聞한 後 該營門의 大將과 該衙門의 堂上을 莫論하고 또한 制書有違의 律을 施行하고, 隱匿하여 啓聞치 아니한 것이 京에서 現發된다면 道伯과 같이 勘罪하고, 이로서 定式 施行할 것은 典律通報와 禁府, 刑曺의 騰錄에 記載되어 있으니 因하여 이 뜻으로서 卯堂으로 하여금 諸道에 行會하여 各各 다 알게하여 犯行이 없기를 期함이 可하다 하였다. 12年 次對들이 入侍함에, 임금께서, 朴尙春의 疏中 所陳에, 北路弊의 8條에, 다 意見이 있다 하므로 昨日 이미 그를 召見하고 條目을 따져 물으니 그 對答이 또한 詳悉한지라, 卿等이 條陳 稟處하라 하였다. 領議政 金政仁은 其 1은 은광 金穴의 敗徒와 逃租, 避役의 健兒가 수풀같이 成群하여 때로는 攘奪을 마음껏 하고, 流徒하는 무리들이 村閭에 作拏하는 者는 盜賊으로 더불어 罪를 같이 하여 特別히 禁止를 加하고 本土로 刷還할 것이며, 광점의 弊는 朝家에서 이미 그를 이미 洞察하고 年前에 飭敎를 諸道에 遍下였은즉 疏中에 云云한 것은 이 구광과 舊店을 말한 것 같으나 荒年의 政事가 暴子弟를 엄즙하기 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으며 한번 所請에 依하여 아울러 逃租나 避役의 無賴輩로 더불어 各其 地方官이 그 社里를 嚴飭하 萬若 成群 掠奪하거나 村閭를 作拏하는 者 있으면 官府에 捉納하여 行盜의 律로서 施行하고, 또한 官府에서 時時로 형찰하여 或은 本土로 刷還하고, 或은 別般으로 奠接하여 이들로 하여금 各各 그 所屬에 도라가도록 함이 마땅할 것이라 하였다. 左議政 李性源은 御史가 바야흐로 道內에 있으니 그로 하여금 一體 금즙함이 마땅할 것이라 하였다. 右議政 蔡濟恭은, 無賴輩가 成群함은 盜賊으로 더불어 무었이 다르리오. 各別 嚴禁하는 뜻을 道臣과 御史에게 申飭함이 마땅할 것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依하여 하되, 개광과 設店을 또 嚴防코져함은 곧 나의 爲民하는 苦心인데 議者는 或 地理를 藏塞할 必要 없다 하나 이는 達論이 아니로다. 銅을 求하려면 倭銅이 있고, 銀을 求하려면 燕銀이 있으니 何必 地下에 遺利를 없이한 然後에 바야흐로 우리나라가 富盛하다 하겠는가. 近年 以來로 有司의 臣이 朝家의 本意를 시득하여 광점 一事를 비록 敢히 筵席에서는 發說치 못한다 할지라도 萬若 某處에는 銅이나고 某處에 銀이 난다는 것을 듣는 다면 이를 看審함을 稱託하여 문득 差人을 보내게 되니 外方營邑에서도 또한 다 이같이 하는 故로 이에 朴尙春의 疏論이 있게 되고, 또 疏語를 본다면 이미 設置된 것을 말함이 아니오, 곧 將次 設處하는 爲弊를 말함이니 그말이 옳은지라, 지금부터 科條를 嚴立하여 朝令을 經稟하여 頒示함은 없으나 서울에는 有司, 外方에는 營邑이 牟利輩의 말을 甘廳하고 看色 假稱을 하여 差使를 發遺하는 者로서 有司의 臣과 當該 道臣은 곧 制書有違의 律과 5等 奪告身을 施行하고, 功議에는 分揀치 말 것이며, 이를 禁하지 않고 或 自犯하는 守令은 營門에 拿致하여 從重 決杖하여 3年 禁錮로하고, 各其 差人은 嚴刑 1次하여 定配하고 計士와 營裨도 同律로 하고, 無賴輩는 官令에 因한 것과 官令이 없는 것을 莫論하고 이러한 等處에 두류하는 者는 各其 당해 討捕營으로 하여금 直接 治盜의 刑을 施行하되 首倡人은 充軍할 것을 定式 施行하고, 禁府·戶刑曺 및 巡營·討捕營은 이로서 揭板하고, 頒令의 期限을 좀 기다려 可送處에 摘奸을 別遺하고 이 뜻을 廟堂에서 拔例하여 本道 및 諸道에 嚴飭하여 實效있게 함이 可하다 하였다(堂上廳에 揭板할 것). 蔘貨 造 蔘 英宗 28年 傳敎에, 蔘契의 造蔘이 極히 無狀한지라, 細辛으로 作朔하여 1點의 蔘肉없이 蔘皮로서 糊封함은 어찌 細鉛과 다르리요. 하물며 細辛은 泄瀉를 시키는 藥材인데 어떻게 補蔘을 造作할 수 있으랴. 옛 날 羊祐도 곧 一將인지라 진실로 敵國을 믿는 故로 어찌 짐인하는 羊叔子가 있으리요. 陸抗이 또한 이르되 堂堂한 나라로서 이웃나라를 사귀고 있는 彼요마같은 貢人이 이같이 作傭하여, 隣國을 不信케 하는가. 대저 造蔘은 禁令인지라 今番을 보건대 無狀함을 測量할 수 없으나 度支大臣은 嚴飭하기를 請하지 않고, 敢히 許用하기를 請하니, 그 交涉이 글렀도다. 前戶曺判書 金尙星은 從重 推考하라. 이는 決코 貢人輩의 所爲가 아니고 반드시 製造人에 있으니, 首倡한 製造人은 한번 行首 貢人의 例에 依하여 嚴訊하여, 島配할 것을 該曺에 分付하라 하였다. 〔重補〕 今上 7年 平安監司 李性源의 啓本에 因한 刑曺의 回啓에, 江界座首 朴順長·裨將 金德俊·朴昌運이 李應燮을 종유하여 尾蔘에 풀을 발라 모래를 섞어 그 斤量을 무겁게 하고 剩餘品을 取하며 潛賣하니 情節의 狼藉함은 一律에 屬하고 安國柱는 풀을 발라 作片한 것이 이미 그 손에서 나왔으니 도타하였다는 것으로서 그대로 둘수 없음으로 譏捕 勘處한다 하였다. 判付內, 安國柱를 捕捉한 後 遽然히 照律하여서는 않되니 作奸한 情節을 嚴刑으로 핵처하라 하였다. 安國柱를 就捕한 後 道啓에, 安國柱를 이에 捕得하므로 朴亨采와 전댁수는 國柱의 招辭로 因하여 一體로 구핵한즉 國柱·亨采가 모래를 섞어 作奸한 것을 個個 自服하고 댁수는 和沙를 參看하였으나 指示 主張한 者는 順長이며, 自手로 和沙한 者는 國柱와 亨采이며, 情을 같이하여 隨參한 者는 댁수이나 各人의 招內에, 塗糊와 和沙를 莫論하고, 昌運은 처음부터 酬酌함이 없었다하고, 和沙한 것을 昌運이 容或 알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2斤의 尾蔘이 이미 昌運한테서 出給되었은즉 符同한 罪 敢히 發明할 수 없음으로 該曺로 하여금 稟處한다 하였다. 曺回啓에, 順長과 昌運의 酌處는 이미 成命함이 있으니 更議할 것 없으며 댁수는 亨采等의 手犯에 比하여 首從의 別이 없지 않음으로 順長等의 例에 依하여 輕重을 나누어 照律하고, 國柱와 亨采는 自手로 和沙한 것을 이미 承款하였으니 道臣으로 하여금 結案을 받아 具格 啓聞한 後 稟處한다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採蔘 肅宗 14年 邊邑에서 採蔘을 犯禁하는 者의 律을 申定함에 있어서 前日 犯採者에 對한 定律이 없었으니 大臣에게 收議하라 命하였다. 領議政 金壽興은, 변졸와 邊將이 管下로서 採蔘한 者는 極律을 施用하고, 群衆을 모아 犯採한 者는 그 首倡을 斬刑에 處한다 하였다. 稅 蔘 英宗 10年 戶曺判書 宋寅明의 所啓에, 倭館에 往來하는 蔘商은 반드시 本曺에서 成帖한 公文을 納付한 然後에 바야흐로 被執하게 되고, 本曺에서는 그 稅蔘 5·60斤을 收捧하여 倭館이 禮單蔘으로 하였드니, 近來 潛商이 날로 부러나고, 松都商價에 本來 潛貨하는 者 많음으로 不得己 松都 旅客家를 搜檢한즉 果然 用蔘하는 文書를 얻었음으로 마땅히 刑曺로 移送하여 律文에 依據 定罪하여야 하므로 이에 먼저 仰達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行査한 後 刑曺로 移送함이 可하다 하였다. 商 賈 潛 商 肅宗 37年 임금께서, 潛商은 一罪에 處하고, 次律인즉 極邊 또는 絶島에 定配하여 屬公한 後 次律을 施用하게 됨은 過重할 것 같으며 徒配로서도 足히 징광될 터이니 이로서 定律함이 可하다 하였다. 左議政 金昌集은 擧條를 書出하여 關西等處에 分付함이 마땅할 것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允許하였다. 景宗 元年 平安監司 권업의 狀本에, 冬至使가 入去할 때 私奴 守天과 馬頭奴 勺達과 이들이 갖고 있는 貂皮 41令이 捕捉되었음으로 本曺로 하여금 稟處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本曺 粘目에, 禁制物品을 潛賣한 것은 輕者는 杖 1百에 徒 3年으로 하였으니 貂皮는 輕物에 屬하므로 아울러 杖 1百에 徒 3年으로할 뜻을 回移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英宗 35年 領議政 金在魯의 所啓에, 이는 平安監司 李成中의 狀本인지라. 今番 皇曆 제자관이 回還할때 義州 刷馬驅人인 李從之·李德永·金一寬·李其同等이 馬尾를 潛賣하였으니 廟堂으로 하여금 稟處하기를 請한다 하므로, 馬尾를 見捉하니 이미 禁物이 아니며, 또 無時로 潛越한 것으로 더불어 비록 間隔이 있다 할지라도 그 燕貨를 挾帶하고, 潛賣를 締結한 罪는, 依法 嚴繩치 않을 수 없으므로, 續大典의 潛賣에 對한 法文과 辛未年 勘處한 例에 依하여, 李從之는 杖 1百에 減死 遠配하고, 金一寬·李從永·李其同도 아울러 杖 1百에 徒配로 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允許하였다. 緞 商 英宗 24年 傳敎에, 슬프도다 몇해를 苦心하여 그 紋緞을 禁止함은 卽 나의 小政이나 그 所聞한 것은 이 法이 或 解弛 함인지라, 다만 紋緞과 緞綾을 禁하니 中古에 無紋한 것은 비록 禁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回還하는 書狀의 所達을 듣건대, 옛날 有紋하든 것이 지금은 無紋이라 하니 슬프다. 紋緞을 禁함은 卽 禁緞하는 뜻이나 紋을 禁한다는 前日의 令은 이것이 所謂 小政인지라, 萬若 이 無紋緞이 國內에 廣行된다면 지금 날로 사치하는 때에 다만 그 비단을 取할 터이니 어찌 紋의 有無를 論하리요. 果然 이같은 나의 小令이 또한 國內에서 施行되지 않으니 寒心함을 이길수 있으랴. 저는 비록 팔기를 求한다 할지라도 나는 마땅히 買來치 않아야 할 터인지라 今番 行首譯官 安命說의 말에 옛날 有紋한 것을 商人에게 委囑하여 거문한다하니 萬若 嚴懲치 아니한다면 將次 후폐를 막을 수 없으므로 當該 首譯이 回來한 後 該府로 하여금 嚴處하고, 옛날부터 緞綾中無紋한 것은 비록 一切 不禁하였다 할지라도 옛날은 紋이 있었으나 지금은 紋이 없어진 것도 一旦 有紋例에 依하여 嚴禁한다 하였다. 官衛 관문란입 肅宗 19年 兵曺의 草記에, 別監 한 사람이 通化門에 來到하여 그 婢子를 請入하므로 守門將이 그를 退却한즉 또 宣仁門에 이르러, 한편은 門前을 擁立하고, 한편은 軍士를 劫迫하여, 구태어 난입하려 하므로, 守門將이 곧 그 婢子를 執捉로 한즉, 別監 十餘輩가 그 婢子를 빼앗고 仍하여 毆打하였으니 當該 別監은 攸司로 하여금 査治함이 어떠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允許한다 하였다. 武藝別監 金壽韓은, 遲晩하였으니 宮內에 忿爭한 소리가 御坐所에 통하게 한 것과 서로 毆打한 者는 杖 1百의 律에 照律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允下하였다. 23年 兵曺의 草記에, 關門을 이미 닫은 後에 한사람이 몸에는 靑衣를 입고, 손에는 小杖을 갖고, 萬壽殿 뒤 水口門안에 들어와서 唱歌 徘徊하는 擧止가 殊常하므로 近仗 軍士가 이를 잡고, 腰脾를 考見한즉 이는 禁衛牙兵 崔潤一인지라, 그 曲折을 물은즉 日暮한 後 丹鳳門으로 들어왔다하나 水口門에 들어간 事實에 이르러서는 거짓 乘醉한 것 같이 하여 끝내 直告치 아니함은 情狀이 駭怪하니 該曺로 하여금 科斷하고, 當該 守門將도 그 責任을 免하기 어려우니 從重 推考함이 어떠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潤一의 所爲는 完人이 아닌 것 같고 또한 隱情이 없으므로 停刑 定配할 뜻으로서 下敎한 것이니, 當初 分付에 依하여 處斷함이 可하다 하였다. 英宗 23年 本曺判書 柳 儼의 所啓에, 梁天杓가 風物鼓를 醉打한 罪를 重勘한다면 一罪이며 輕勘한다면 笞이나 先朝 丙申年의 受敎인즉 闕門을 打叩하고 昏夜에 亂叫함은 死律을 免하기 어려운 것이나 實은 醉酒의 所致이므로 重律로서 處斷함은 審愼하는 道가 아닌듯 하여 特命으로 定配하고 續大典에 入錄한 일이 없었 음으로 敢稟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丙申年受敎에 依하여 勘處하라 하였다. 今上 5年 兵曺 草記에, 오늘 開坐時에, 近仗 軍士가 來告하되 章標없는 1漢이 酒壺를 메고 난입하므로 執捉하여 와서 戶牌를 取考하니 卽 私奴山金인지라 그 난입한 事由를 물으니 酒壺의 去處인즉 지난날 燈燭房을 隨行하든 軍士라 하므로 지금 賣酒하기 爲하여 入來한다 하니 肆然히 난입하여 賣酒코져 하는 計巧는 尋常히 處罰할 수 없으니 從重 勘處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重補〕 6年 兵曺 草記에, 敦化門에 어떤 사람이 곧 난입코져 하므로 守門軍卒이 執促하여 捕廳으로 移送한다 하였다. 傳敎에, 刑曺로 移送하라 하였다. 曺啓目에, 난입인 權 晤의 三句不道의 說은 毛骨이 俱悚하므로 設鞫 엄핵한다 하였다. 傳敎에, 權 晤의 罪를 어떻게 處斷하여야 할가 스스로 罔測 不道한 말을 만들어 縉紳의 計를 網打코져 計劃하였으니 萬若 肆市의 典을 극거하지 않는 다면 다만 人心을 鎭撫하고 世道를 精勵할 수 없을 뿐아니라 在朝하는 사람들이 다 將次 크고 큰짐을 擔負한 것 같이 度日하여 止泊할바 없음으로 方來하느 憂慮 더 極할 수 있으랴. 萬若 徑斃하는 일이 있더라도 輿人의 憤怒를 일으키지 않도록 用刑하기를 기다려 王府로 移送하여 具格 結案하고 邦家의 刑律을 快施하는 땅에 傳敎를 後因하여 捕廳으로 移送하라 하였다. 〔重補〕 7年 政院의 啓辭에, 肅章門內 生員 李行有가 扈衛官軍이라 假稱하여 屢次 打鼓하므로 法司에 移送하여 구핵한다 하였다. 傳敎에, 闕門에 난入하기도 不足한 身分이, 肅章門內에 至入함은 이 또한 不足하고 章甫로서 軍卒의 服色을 變着하고 甚至於 許多한 名色이 扈衛軍官이라 稱하는 것은 후폐에 關係되므로 尋常히 處罰할 수 없으니 嚴刑으로 取招하여 期於히 得情하라 하였다. 曺啓에, 肅章門에 冒入하여 更鼓를 亂打함은 萬萬 寒心 하온지라 犯罪事實을 남김없이 實吐하도록 加刑하였든바 崔錫祿이 行有의 일을 相議하지 안는 것이 없음을 嚴訊 得情하였다한다. 判付內에, 行有의 난입이 崔錫祿의 指示에 依한 것을 저 이미 일일이 自服하였은즉 犯者는 비록 李行有이라 할지라도 犯行하게 한者는 卽 錫祿이며 이 獄事의 原謀는 錫祿이니 行有와 아울러 1次의 刑을 施行하고 照律할 것을 啓聞하되 闕門을 出入함에는 스스로 信標가 있어서 賤隸에는 信漢符가 있고, 禁旅에는 勿禁牌가 있고, 將校에는 또한 傳令이 있는 것이나, 홀로 扈衛軍官에게는 元來 憑考하는 物標가 없으니 이는 한番 釐正치 않을 수 없는지라 이 뜻으로서 該廳에 移牒하여 從長 變通할 것을 仍하여 곧 草記하라 하였다. 曺 草記에 大明律에 午門을 난입하여 寃枉을 叫訴하는 者는 杖 1百에 充軍한다 하였고, 大典準計에는, 律文에 依하여 杖 1百, 流 3千里에 準한다 하고, 詐敎人 犯法條에는 사람을 敎誘하여 犯法케 한者는 犯人과 同律한다 하였음으로 李有行·崔錫祿은 各各 流 3千里에 定配한다 하였다. 傳敎에, 알았도다 하였다. 〔重補〕 11年 都摠府 草記에, 本府郞廳 李汝節이 宣仁門을 巡到할 때 南陽 산다는 朴祖憲이 道袍를 입고 난입하므로 該曺로 하여금 査治한다 하였다. 兵 曺 草記에 宣仁門에 어떤 한 儒服人이 난입하므로 그 委折을 무른즉 自言 키를 泮路를 잘못찾었다 하므로 攸司로 하여금 嚴飭한다 하였다. 曺啓에 朴祖憲이 난門인줄은 알지 못하고 泮宮으로 誤認한 것이라 하나 그 踪跡이 너무도 疑心스러움으로 嚴刑 得情한다 하였다. 判付內에, 隱情이 없는 것 같으면 該道 巡營에 下送하여 誤入한 罪를 無故日을 기다려 參酌 懲治하여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13年 承政院의 上秦에, 司僕寺 巨達이 章標를 不佩하고 咨意로 난입하므로 照法 嚴治한다 하였다. 曺草記에 大明律의 宮殿門 擅入條에, 무릇 皇城門을 擅入한 者는 杖 1百이라 하였음으로 巨達 安千輝는 嚴杖 1百으로 한다 하였다. 傳敎로 알았도다 하였다. 〔補〕闕門拔刀 仁祖 8年 禁府의 啓에, 玄守男의 決杖한 事件은 判下하온지라, 拔劍闕入한 罪는 律에 있어서는 應當 處絞하여야 하므로 當初 據法 照律하였으나 自上에서 或 無情에서 나온 것이라 念慮하여 減死 照律하라는 下敎가 있었음으로 臣等이 聖上의 好生之德을 欽仰하여 杖 1百·全家의 律로서 照入하였드니 이제 萬若 決杖만 한다면 이는 把守를 잘못한 軍士와 더불어 同科하는 것이니 다만 本罪를 보아 用律이 너무 輕할 뿐아니라 이제 이미 大赦도 지났으며 杖 1百이란 것도 마땅히 蒙宥中에 있어야 하며 拔劍 入閥한 罪를 1杖도 施行치 아니하고 放送한다면 後弊를 勝言할 수 없음으로 仰達치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께서, 啓辭에 所見이 없지 않으니 前과 같이 照律 施行하라 하였다. 今上 元年 兵曺色 丘奴 重根이 闕內에서 受棍할 때 칼을 빼어 자르고져 한 것을 臺啓에 因하여 嚴査 承服한지라. 三覆時, 判付內에, 專혀 無知한 常漢에서 나온 일이니 減死 刑配하라 하였다. 〔重補〕闕門結項 今上 7年 咸興 都致大가 敦化門外 階下에서 結項하였다. 曺啓에 致大를 再三으로 推窮 詰問하니 負債가 과다하여 身勢 迫隘하므로 죽음으로서 判斷코져 한 것이라 하며 納供한 結果인 즉 또한 債錢을 거두고져 하였으나 呼訴할 길이 없어 이러한 擧措를 造作하여 天聽되기를 要한 것이라 하니 저의 納供이 債錢에서 나온 것이 아닌즉 한번 行査하는 것이 可하므로 道臣으로 하여금 査處한다 하였다. 判付內에, 이러한 供述로서 본다면 可히 그 切肌한 苦痛에서 困窮함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이 申訴하는 擧措는 本道에 出付하여 處置함이 可하니 厥漢은 本道로 下送하라 하였다. 〔重補〕闕門投石 今上 7年 慶州 具仁遠·李漢成·鄭始輝등이 京倉의 穀物을 受 함에 斛少한 米縮으로서 衆人을 煽動하고 闕外에 斛하여 闕門에 投石하고 門卒을 歐傷하므로 因하여 本道에서 안핵한 啓本內에는 一律로서 處斷한다 하고, 仁遠의 妻 李召史의 擊錚한 原情에 因한 批旨內에는, 이 獄案은 마침내 確然치 못한 것이 있고 向日 筵席에서 遞來한 南城尹이 말하기를 어려워 한 것도 이때문인지라. 首從을 區分코져 한즉 한 獄事에 元來 3犯이 없는 것이고 首位를 區分치 아니하고져 한즉 幾十名의 그 무리를 다만 3囚를 장차 대벽으로서 擬律한다 함은 由前 由後에 獄情이 자못 어긋나게 될 터이니 이로써 啓覆을 기다려 널리 諮詢하여 決處한다 함은 이미 筵敎한바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本事의 言端을 이미 發論한 後이므로 아무 考慮없이 버려둔다 함은 獄을 重히 하는 뜻이 아닌 것 같으니 卿等은 다시 商確을 加하여 좋은 意見을 내어 指一 草記함이 可하다 하였다. 曺草記에, 倉庭에서 기뇨하고, 闕外에서 叫 한 具仁遠·李漢成은 곧 그들의 首倡이며, 鄭始輝는 비록 倉所에는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投石한 1款은 3囚가 1辭로 承款하였으며 闕門에 投石함은 古今에 所無한 變怪이므로 이제 萬若 惟輕으로 傳生한다면 將次 亂民을 懲治할 수 없음으로 詳覆 擧行한다 하였다. 傳敎에, 允許하였다. 丁未年에 또 그 妻의 嗚金으로 因한 曺草記에 仁遠이 首倡으로 작나하여 禁門에 投石한 罪는 承款 結案되었음으로 律을 考察하여 嚴處한다 하였다. 傳敎에, 允許하였다. 庚戌年 道啓에 因한 別諭內에, 具仁遠의 獄事는 어찌 他議를 容納하리요마는 首從이 本來 的確하지 못하고, 共犯中 先斃한 者 많으며 홀로 仁遠에게만 用律함은 斑駁에 가깝고 前尹으로서 還朝한 者 이와같이 陳白한바 있었으나 아직도 자저하고 있는 것은 獄體를 重하게 함인지라, 지금 대패를 만나 어찌 持할 수 있으랴. 特別히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궐문쇄약 今上 9年 承政院의 啓辭에, 闕門의 쇄약이 至重 無比한 것이나 오늘 하약할 때 金虎·通化 兩門의 쇄약을 서로 바꾸어 分給하므로 換鎖하는 擧措를 일으킨 當該 사약을 攸司로 하여금 科治한다하였다. 傳敎로, 允許하였다. 曺의 啓目에, 사약 林義培를 考律 嚴勘한다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11年 兵曺 草記에, 曜金門 橫木의 排目이 1箇 脫落되었다 하니 至重한 금약을 밤이 지내도록 곧 치지 아니함은 不可하고 爲先 禁門監으로 하여금 排目을 新造하여 門隙으로 狂納하여 고쳐 두었다가 明朝를 기다려 舊橫木을 改造한다 하므로, 當該 守門將과 宣傳官은 拿處하고, 사약은 科治한다 하였다. 傳敎에, 橫木의 修葺은 그 責任이 本曺에 있고, 入直하는 郞廳이 좀더 按視 執이하여 진즉 改修하였더라면 어찌 이렇게 되었으리요, 入直 堂上은 推考하고, 郞廳은 拿問하고, 守門將의 責任이란 開門한 後 난입을 禁하고, 閉門할 때 약시를 지키는데 不過하므로 橫木의 有孔無孔과 排目의 折不折은 저들의 職掌이 아니니 그만 두고 此後로는 摘奸을 時時로 派遣하여 그를 뚜드려보아 만약 自開하는 弊가 있다면 入直한 堂郞을 軍律로 嚴斷하고, 城門을 쇄약하는 무리들도 또한 같은 律로 處斷토록 한다하니 兵判은 그리 알고 쇄약은 紫門 營繕監에서 造出한 것은 堅緻하지 못하니 此後로는 兵曺에서 物力을 戶曺에서 受出하여 3營門의 宮墻修築例와 같이 將校를 別定하여 打造하도록 이로써 定式함이 可하다 하였다. 문약궐감 今上 5年 傳敎에, 문약을 開閉하는 史官·宣傳官과 사약은 다같이 監視하여 閉門後에 쇄약을 點檢하고 開門前에 또 쇄약을 點檢하는 法意가 果然 愼重 無比한 것이나 들리는 바에 依하면 闕門開閉에는 아예 가지도 않고, 비록 가보는 때가 있다 할지라도 숙장문역의 內外에서 그친다 하니 터무니 없는 일이 이에서 더 甚할 수 없는 지라, 當該 注書는 爲先 汰去하여 該府로 下付하여 勘處하고, 下隸에 대하여는 該曺로 하여금 從罪科重하라 하였다. 〔重補〕今上 13年 承政院의 啓에, 注書가 문약을 監視하는 法意는 至重한 것이나 오늘 金虎門의 注書가 進去하지 안는 것은 甚히 警駭한 일이므로 下敎에 依하여 假注書인 徐有聞處를 査問한즉 지난 正月 12日에 비로소 堂後에 들어 갔으나 18日과 21日 開門時와 27日 閉門時에 全然 出去치 않고 昨夕과 今朝에 이르러 開閉할 때도 아울러 監약치 않았다 하므로 當該 陪隸는 今方 攸司에 出付하여 各別 科治하고, 假注書 徐有聞도 마땅히 重勘하여야 할터이나 이미 捧招하여 啓聞하라는 命이 있음으로 惶恐이 敢啓한다 하였다. 傳敎에, 알았도다 하고 注書를 拿處하라 하였다. 〔重補〕禁 喧 今上 13年 傳敎에 혼훤을 嚴禁하라는 申飭한 本意는, 廷臣으로서 누가 모르리요마는 하물며 大小 殿坐와 動駕할 때 兵曺의 節目中 上司·三司를 莫論하고 下人은 卽地에서 결혼하고 官員은 入啓하여 論罪한다는 例文이 있으니 이는 옛날부터 流來하는 金石의 典인지라 일찌기 肅廟朝에 있어 大臣을 隨從하는 下隷인 所謂 權頭 名色의 난과는 特히 重律로 處置한다 함에 因하여 仍하여 木纓을 달고 있는 무리들은 現發에 따라 痛治하라는 下命은 이로부터 動駕할 때 및 闕中에 들어서는 木纓을 버리게 함이니 옛날 大臣의 權重이 盛際할 때에도 守法이 이같았거든 하물며 餘他의 官司에서 일이요, 館吏들의 所犯이 不輕하여 重하고 閔昌爀의 代表的인 작뇨는 어찌 常情 以外의 일이 아니리요, 校理 閔昌爀은 削職하고, 館吏는 該曺로 하여금 拔例 痛繩하되 該曺에서 査問하고, 또 李相璜 事件에 있어서는, 저가 邇列을 出入하면서 焉敢히 數10年來로 犯하지 못한바를 먼저 犯하는가 檢閱 李相璜은 爲先 천간하여 該府로 하여금 拿問 得情토록 하고 該館 吏隷들도 또한 筵敎에 依하여 分等 痛繩할 것을 該曺에 分付하고, 혼훤의 禁制는 또한 奉命에 屬하니 此後는 이로써 曺屬을 推治하는 者는 該官員은 違抗의 律을 免하기 어려우니 이로써 다시 嚴飭하라 하였다. 〔重補〕 章標借佩 今上 11年 私奴 江阿只가 中樞府 軍士 五福의 章標를 借佩하고, 宣仁門을 冒入하므로 攸司로 하여금 科罪한다 하였다. 曺草記에, 大明律에 桐木牌를 面借하는 者와 借與하는 者는 杖 1百으로 한다하고, 大典通編에, 役名을 不明實한 者는 杖 1百에 徒 3年으로 한다 하였으니 江阿只는 杖 1百에 收贖 定配하고, 五福은 杖 1百에 收贖키로 上奏한다 하였다. 傳敎에 알았도다 하였다. 宮城踰越 肅宗 22年 本曺判書 金鎭龜의 所啓에, 頃者 宮墻을 踰越한 女人을 兵曺로부터 臣曺에 移送되온지라, 구핵하는 즈음에, 言語와 擧措가 分明히 失性한 狀態이며 그 根脚을 물으니 乃是 私인지라, 그 主人에게 詰問한 즉 그 女는 元來 常性을 喪失하였다 하고 그 見聞을 參考하여도 果然 疑心이 없으며 이같은 病人은 마땅히 參酌하는 길이 있어야 하므로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減等하는 律文에 依하여 施行함이 可하다 하였다. 44年 右議政 李의 所達에, 宮城을 踰越한 罪人 元山을 臺疏에서 方今 依律 處斷으로서 爭執하고 있으나 그 情狀을 論할 것 같으면 實로 過重하다는 것이라 하였다. 本曺判書 兪集一은, 律文을 考見하면 마땅히 1罪로 하여야 하나 邸下의 好生之德으로서 特別히 減死로서 施行함이 爲宜라 하였다. 敎令에, 減死 定配하라 하였다. 45年 西所 軍士奴 次元이 밤에 崇義門 宮墻을 넘다가 軍士들에세 所捉되여 兵曺에서 草記하여 本曺로 移送되온지라, 次元은 供述하기를, 醉中의 所爲라 하였다. 徽旨內에, 次元의 所犯은 泥醉中의 人事를 不省한 所致에서 나온 것임으로 合當한 參酌이 있어야 하니 特히 減死 定配하라 하였다. 英宗 13年 訓局에서 通化門 宮墻을 踰越한 卜才를 執捉하여 本曺로 移送하였다. 本曺 啓目에, 律文內 무릇 皇城을 踰越한 者는 絞刑에 處한다 하였고 肅宗 甲申年 萬壽殿 墻垣을 踰越한 罪人 賓伊와 今上 乙卯年 景秋門을 毁墻檣 踰越한 罪人 둘남이를 아울러 決杖 放送하였으니 지금 이 卜才는 賓伊와 둘남이와 異同이 없는 것 같으나 跳出한 事實을 저 이미 遲晩하였은 즉 宮墻을 踰越함은 이 一罪에 屬하므로 例에 依하여 取招 結案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그 所供을 본다면 參酌이 없지 않으니 決杖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 今上 9年 兵曺 草記에, 烽火를 올릴 때 어떤 두 사람이 建陽門西墻을 踰越하므로 捉來하여 査問한즉 別監房 軍士 金致徵·金持彰이 傳漏處에서 待令할 즈음 建陽門이 이미 닫혔음으로 不得己 踰墻하였다하므로 攸司로 하여금 科治한다 하였다. 曺啓目에, 宮墻을 踰越함은 이 一律에 屬하므로 嚴訊稟處한다 하였다. 判付內에 宮墻을 踰越함이 비록 一律에 屬한다 할지라도 厥漢의 所越한 곳에 이르러서는 듣건대 舊垣의 基地라 하니 그런즉 踰墻으로 論함은 不可하니 아울러 刑推를 一次하여 畿沿에 爲奴하라 하였다. 衛外憂過 孝宗 9年 本曺啓目에, 慕華館 擺撥軍 宣永萬이 駕側을 直過한 罪를 이미 遲晩하였으며 이는 一罪에 屬한지라 取招 結案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減死하여 不限年 邊遠으로 定配하라 하였다. 肅宗 23年 傳敎에, 어떤 下隷가 雨傘을 갖고 布帳을 掠過하다가 至敬한 땅을 侵犯하였음은 至極히 痛駭한지라 攸司로 하여금 從重 科治하라 하였다. 本曺啓目에 律文內, 衝突衛仗條에, 侍衛하는 駕護軍官을 除外하고 儀仗門內에 充入한 者는 絞刑에 處한다 하였음으로 律에 依하여 處斷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件內에, 律은 비록 이같다 할지라도 情으로 서는 可恕할 바 있으니 特히 從重 決杖하여 徒配하라 하였다. 31年 侍講院의 上奏에, 王世子께서 宮을 나와 宜春門外의 石橋를 지날 즈음 雨傘을 받쳐든 差備가 行步를 不愼하여 猝然 질족 되므로 世子의 冕旒에 觸通되어 그 警惶함을 可히 말할 수 없었으니 攸司로 하여금 從重科治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어두운 밤에 질족함은 實로 無情에서 나온 것이니 決杖 放送하라 하였다. 今上 5年 傳敎에, 莫重한 所御 轎子를 탁두함에 이르러서는 極히 警駭한 일인지라 當該 小宦은 該曺로 하여금 今日內에, 開坐 嚴査하여 啓明하고 이를 掩置하여 不奏하는 中官은 該府로 하여금 處治하라 하였다. 宮墻落矢 肅宗 16年 兵曺 啓辭에, 敦化門 部將이 來告하되 門內에 떨어진 화살을 備局使令 張業이 拾納하였다 하므로 그 화살을 考見한 즉 許星이라는 이름이 記錄되어 있으며 許星은 卽 訓局의 馬兵인지라 張業과 許星을 該曺로 하여금 推治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本曺啓目에, 小兒 檢於松이 所持한 己矢를 張業이 희취하여 彎弦할 즈음 잘못 發矢되어 화살이 敦化門內에 떨어졌음을 이미 承服하였으며, 大明律에, 太廟와 宮殿을 向하여 射箭·放彈·전석을 던진 者는 絞刑에 處하고, 宮殿과 宮門은 다르다 하고, 이밖에는 다른 可施할 罰이 없음으로 張業은 이 律에 依하여 處斷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이는 희취 彎弦에서 偶然히 誤落된 所致에 不過하니 무엇을 그렇게 深治하리요 從重 決杖하여 放送하라 하였다. 今上 5年 北道 武士들의 試射를 親臨할 때 兵曺 啓辭에, 穩城出身 吳彭齡이 허리에 鐵鞭을 차고 帳殿의 只尺에서 應射하는 것은 至極히 無嚴한 것이며 箭의 發射할 때를 봄에 화살을 宮墻밖에 떨어지게 하였으며 무릇 寸鐵을 띄고 宮殿에 들어온 者는 이 死罪에 屬한지라 本營에 下送하여 取招 狀聞할 것을 請하였다. 道臣의 狀本에, 吳彭齡은 敢히 能熟하지 못한 技術로서 肆然히 應擧하여 마침내 화살을 宮墻에 떨어지게 함은 至極히 痛駭한 짓이며 鐵鞭에 이르러서는 저의 兄 彭年이 그 弟의 遠行을 爲하여 防身의 物로 贈送한 것임으로 或 亡失을 念慮하여 闕中에 까지 佩入하였다 하니 그 所犯을 論하면 스스로 當律이 있음으로 該曺로 하여금 稟處한다 하였다. 本曺判書 金魯鎭의 回啓에, 宮墻에 落矢함은 이미 射力의 不及에 因緣함이요. 鐵鞭을 帶入함은 또한 法禁의 미암에 緣由함인즉 形跡은 비록 可駭하다 할지라도 事實은 無情에서 나온 것임으로 死律에 據擬함은 不可하고 遠配의 典을 施行함이 合當할 터이며, 그 兄 彭年은 그 弟 遠行을 爲하여 防身物로 贈送하였음은 이 異事가 아닌지라 上京 犯科에 이르러서는 預料한바도 아니므로 그 本情을 論한다면 可罪할 端緖가 없으니 參酌 放送할 뜻을 一體 道臣에게 分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闕門失火 肅宗 8年 西所部長의 直廬에 失火된지라 本曺 啓目에, 西所 書員의 私奴 貴益은 마땅히 照律하여야 하되 律文內에 失火로 宮闕을 延燒케 한 者는 1罪로서 論하고, 宮府에 失火한 者는 杖 80에 徒 2年으로 한다 하였으나 貴益의 罪는 禁火를 不謹함에 있는 것이여 失火와는 不同하므로 공해실화의 律로서 勘罪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17年 世子宮 別監이 入接한 草家에 失火된지라 本曺 啓目에, 律文內, 宗廟 및 宮闕에 失火한 者는 絞刑에 處한다 하였으니 失火罪人 吹螺赤朴 善을 例에 依하여 取招 結案하여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 이제이 失火는 別監이 入接하는 假家에서 낳은 것인즉 殿閣을 延燒한 者와는 有異하니 이로써 照律하여 朴 善은 杖 1百에 流 3千里로 하라 하였다. 〔重補〕 宮殿失火 今上 4年 曺啓에, 罪人 奴 德金은 蒼朮를 찾고져 入庫하여 所吸하든 煙草의 떨어진 불로 殿宇를 延燒케 하였음은 이 一罪에 屬한지라, 法典에 依하여 詳覆 施行한다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壬寅 5月 惠政橋 殿坐時에 減死 定配하였다. 성 인 〔重補〕 성문쇄약 今上 15年 兵曺 啓辭에, 去夜 巡邏軍이 五間 水門에 이르러 門鎖를 打起한 즉 약철이 自開한다 하니 城門을 잠근 쇄약을 이같이 疎虞하게 한 守門將卒을 照律 重繩한다 하였다. 傳敎에 允許하였다. 曺草記에 律文을 取考한즉 京城門을 壇開한 者는 杖 60에 徒 1年이라 하였으니 守門將 韓成佾과 軍卒 鄭光順·吳順興을 이 律에 依하여 杖配하기를 上奏하였다. 傳敎로, 允許하였다. 〔重補〕 都城踰越 今上 9年 僧 快彦이 都城을 踰越한지라 刑曺의 上奏에, 快彦이 京城을 구경코져 하였으나 僧侶에는 至嚴한 畿內의 出入을 禁制하므로 入城하지 못하고 南山밖에서 넘어 보았으나 다른 隱情은 없었다 한다. 判付內, 明白히 그 다른 隱情이 없는줄 안다면 都城을 踰越한 律로서 照勘하라 하였다. 刑曺 草記에 僧 快彦은 律文에 依하여 決杖 1百에 流 3千里 定配하기를 上奏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寢 廟 묘문난입 今上 4年 宗廟署의 上奏에, 望祭의 前日 刑曺의 禁吏들이 進排하는 下隷에 混入하여 禁亂이라 稱托하고 待令하는 屠漢을 廟門內에서 捉去하였으니 太廟의 事體 嚴重 無比하온바 禁吏들이 辭然 突入하였음은 尋常히 處治할 수 없음으로 禁吏 및 隨從 使令을 攸司로 하여금 從重 科治하고, 禁吏들을 내어보낸 堂上官과 廟의 司祭監·守門將을 아울러 拿處에 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允許하였다. 廟垣踰越 屬從 25年 宗廟를 守直하는 軍士의 私奴 先伊가 夕時에 出去하였다가 돌아온즉 門이 이미 닫쳤음으로 그 點考에 빠지게 됨을 두려워 하여 담장을 넘어 들어옴을 本曺로 移送되여 추핵하였으나 律文에 相當한 律이 없음으로 本曺에서 刑推 放送하였다. 〔重補〕今上 6年 本曺判書 徐有隣의 所啓에, 太廟 墻垣의 頹 한 곳으로 난입한 田雨龍을 嚴重히 추핵한즉 年少 迷劣한 所致로 紙鳶이 떠러짐을 보고 把子안으로 손을 넣어 拾出할 즈음에, 半身이 기우려 들었다한다. 이미 當律이 없음으로 旁照가 있어야 하나 大明律을 取考한즉 皇城을 踰越하는 者의 罪 極律에 關하고 廟門을 推入하는 者의 罪 杖百에 끝인다 하였으니 從重한다면 너무 重하고, 從輕한다면 너무 輕하므로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輕律로서 勘放함이 可하다 하였다. 〔重補〕 歐打廟僕 今上 12年 宗廟의 都提調 蔡濟恭의 所啓에, 宗廟署의 守僕은 비록 下賤이라 할지라도 所關이 어떠한 것이며, 俄頃에 듯건대 政院의 使令 1人과 捕校 1人이 微事로 因하며 守僕들의 出入을 秘密히 기다려서 恣意로 毆打하니 後弊에 所關됨을 仍置할 수 없음으로 法司에 移送하여 査實嚴治하여야 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本署는 至極히 尊嚴한지라 院隷와 捕校들이 作黨하여 守僕을 毆打하였 음은 萬萬 驚駭하고, 後弊에 所關됨을 尋常히 處置할 수 없으니 爲先 該曺로 하여금 首犯 校隷와 作拿한 諸人을 모두 捉來하여 嚴査 啓聞하라 하였다. 刑曺 上啓하였다. 判付內, 捕校金鼎鉉과 院隷 朴枝彬은 從重 勘處하라 하였다. 陵 園 〔補〕 齊陵放火 肅宗 2年 7月 鞫廳의 上奏에, 齊陵 丁子閣의 變은 實을 未曾有의 일인지라 守僕과 軍人等 嚴重히 鞫問을 加하여 그 作變한 사람을 찾어내어 刑章을 嚴正하여야 함은 이 경우에 그만 둘수 없는 바이며, 三省推鞫이란 事體가 重大하므로 作變한 罪人은 알지 못하고 다만 軍卒들의 守護가 不謹하다는 罪로서 앞질러 三省으로 開坐한다면 或 日後에 그 罪人을 잡더라도 加法할 수 없음으로 아직 禁府로 하여금 먼저 究問을 加하여 그 端緖를 얻은 뒤에 다시 三省 推鞫하옴이 事宜할 것 같음으로 敢히 上奏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지금 啓辭를 보건대 可히 大體를 알게 되니 아직 仍囚하여 그 作變한 罪人을 안 後에 다시 稟處하라 하였다. 8月 初4日 禁府 上奏에, 罪人 張得善등은 網常의 比와 같은 것이 아니고 이는 犯逆에 屬한지라 臣等이 本府 文書를 取考하온즉 일찌기 辛亥年에 있어 漣川縣에 殿牌를 偸去한 變이 있었으므로 作變人 愛立을 本道에서 取服 啓聞하고, 本府에서 法例에 依하여 推鞫할 뜻을 啓請하여 擧行하온지라, 이제 得善等의 所犯이 愛立에 比하여 差別없고 三省 推鞫하여야 할 重大한 事體가 아니므로 依法 推鞫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啓에 依하라 하였다. 初5日 禁府 上奏에, 齊陵 丁字閣에 衝火한 罪人 張得善等은 이미 承服하였음으로 正刑에 處하고, 律文에 依하여 綠坐한 妻子는 奴婢로 만들고, 家産을 籍沒하고, 家宅을 破壞하여 저택을 만들고, 그 守令은 罷職하고, 그 邑號를 降等하는 等事는 各其 司로 하여금 承傳을 받들어 擧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允許한다 하였다. 〔補〕 章陵失火 肅宗 24年 禁府 上奏에, 陵上에 放火한 罪人 崔弼誠은 이미 承服하였으니 正刑에 處하고, 妻子는 奴婢로 만들고, 家産을 籍沒하고, 家宅을 破壞하여 저택을 만들고, 그 守令은 罷職하고, 그 邑號를 降等할 것을 逆律에 依하여 施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로, 允許하였다. 孝陵失火 肅宗 30年 孝陵에 失火한 罪人 朱命哲에 對한 律을 收議하라 命하였다. 領議政 李는, 朱命哲은 守陵하는 軍卒로서 비록 아무리 愚蠻하다 할 지라도 어찌 國陵의 至嚴함과 莎草의 易燃함을 모르리요마는 曲墻곁에 煽火하여 陵上에 延及하는 變을 일으켰음은 핍연히 失火 延燒된 것으로서 處斷할 수 없으나, 다만 그 本情이 計劃的인 作變이 아니므로 前日 章陵에 故意로 放火한 罪人과는 間隔이 있으나 萬若 好生하는 德으로서 特別히 收司의 律을 寬施하옴이 欽恤의 道에 害롭지 않으리라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從하였다. 章陵失火 英宗 31年 章陵에 失火한 罪人 李金聲을 減死 島配하였다. 傳敎에, 李金聲이 火繩을 갖고 莫重한 곳에서 유희하다가 이러한 延燒가 있었으니 律文에 비록 故犯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一律로 하였은 즉 저 焉敢히 免하리요 마는 그 爲人을 보건대 몸은 尺餘에 不滿하고, 그 나이를 무른 즉 13歲에 不過하니 이는 正히 律文中 위로부터 裁可를 받어야 할 者인지라 特히 減死 島配하고, 李鳳齡은 몸이 齋郞이면서 至敬한 땅에 砲手를 許入하여 雉獐 을 求索타가 그 孫子로 하여금 이 地境에 이르켰음은 더욱 痛駭한지라 康津縣에 年限없이 定配하고 砲手와 入番軍人은 守直을 不謹히하고 또 直告하지 않았으니 아울러 秋曺로 하여금 嶺東으로 定配하라 하였다. 山陵失火 肅宗 25年 本曺判書 閔鎭厚의 所啓에, 大明律에, 山陵 兆域內에 失火한 者는 杖 80에 徒 2年으로 한다 하였으나 丙子年 受敎內에, 軍器는 失火한 守令과 山陵에 失火한 陵官도 本律을 照勘하되 公罪에는 收贖을 懸入한다하고, 本曺 文書를 考見한즉 徒刑은 受敎에 依하여 收贖하고 杖刑은 或은 禁府로 移送하고, 或은 不問에 付한다 하여 일찌기 一定한 規例가 없으니 대개 이미 收贖으로서 懸入하였은즉 杖刑도 또한 마땅히 그 中에 있어야 하므로 今後는 이로써 定式함이 可하다 하였다. 〔重補〕 今上 13年 右捕廳 草記에, 昭寧園에 放火한 罪人 奴 令乭은 園官의 奴子로서 深夜에 불을 들고 다니다가 延燒케 한 情狀이 흉녕하므로 秋曺에 移送하여 照法 處斷한다 하였다. 刑曺 上奏에, 令乭이 이에 敢히 神宮 近處를 往來하면서 이 비들기를 잡으려고 유희하다가 마침내 莫重한 境地에, 火災를 미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萬萬驚悚하온지라, 大明律失火條에, 失火로 宗廟를 延燒한 者는 時期를 기다려 絞刑에 處하고, 山陵의 兆域內 失火로 神宮을 延燒한 者는 宗廟延燒와 같이 한다 하였으며, 同律 祭享條에, 中祀에 犯行이 있는 者는 大祀의 犯行과 같이 한다. 하였으니 令乭의 犯罪은 이미 承款하였음으로 取招 結案한 後 稟處하고, 同犯番軍과 守僕은 輛重을 區分하여 嚴勘하고, 失火한 擧措가 이미 그 奴子에게서 나왔은즉 그 主人을 勘罪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守奉官 安弘迪을 拿處한다 하였다. 判付內, 염설창연은 眞個의 失火와 더불어서는 다름이 있는 것이며, 옛날 宮惟를 偸竊되었을때 設鞫한 일에 있어서 欽恤하는 聖敎를 屢次 仰聆하였음으로 戊戌年 本園 神御床의 褥席을 偸竊한 罪人을 定律함에도 또한 그때 聖敎의 本意를 仰體하여 分等 處分함이 있었거든 하물며 今番 失火는 더욱 放火와는 다르니 마땅히 參酌 決定하는 擧事가 있어야 하겠음으로 令乭은 嚴刑으로 減死 爲奴하고, 이제 비록 비들기를 잡으려 한 것이라 할지라도 究竟의 疑點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며, 官員의 勘罪도 法典의 定式에 違反됨이 있으니 守奉官 安弘迪은 實病 或은 緊故않인 때를 除하고는 推移할 것 없이 陛遷하는 時期까지 限하여 仍直하고, 모든 守護에 屬하는 節次는 좋은 意見을 내어 精誠껏 擧行케 하는 뜻을 嚴飭하게 分付하였다. 火巢偸埋 今上 4年 罪人 李德澄은 陵寢의 案山 近處에 偸理한 事實이 發維되어 承款한지라 本曺判書 李性源의 結辭에, 大明律 園陵 樹木의 盜取條는, 乃是 不時時 處斬이라 하였으니 德證은 事件이 發覺된 後 一律로 勘斷됨은 境遇에 있어 마지 못한 것이며 또 僞贈이라 書하였으니 大明律 詐假官條에, 또한 不得時 處斬이라 하였으며, 兩罪가 倂發함에 全部 一罪임으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 李德澄의 事件은 法으로서는 可照할 것도 없으나 情으로서는 可恕할 수 있는지라 火巢外 外案近處의 류류한 民間墳墓는 문득 北邙과 같음인 즉 德澄을 偸埋의 律로서 處斷하는 것은 刑政을 揆察함에 앉아서나 서서나 다 보이는 곳이 많이 있으나 德澄의 父母의墳墓는 서서는 보일지라도 앉아서는 보이지 않으니 設令 아직 發覺되지 않는 것과 이미 發覺된 것이 있다면 저 較重한 罪는 그만 두고 도리어 差輕한 德澄만을 處斷한다 함은 어찌 저같은 王法이 있을 수 있으랴. 또 저는 無識한 愚民으로서 마땅히 禁하지 않는 곳인줄 알고 埋葬한 것은 異事가 아닌 것 같고, 僞贈에 이르러서도 또한 山說을 惑信하여 暗地의 誤書한 所致에 不過한 것이나 所引한 詐假官律은 너무나 適當하지 않는 것이며 萬若 德澄을 대벽에 處置한다면 뒤에 或 참으로 偸埋한 것과 詐假官의 罪人이 있을 때는 將次 어떤 律을 適用할 것인가 惟輕으로 傳生하는 것이 조금도 疑端을 가질 수 없을 터이나 事體 莫重하므로 輕斷하기도 어려움이 있으니 이 뜻으로서 時原任 大臣들에게 問議하고, 裵師國의 犯한 바는 別로 疑心할 만한 端緖가 없으니 參酌 放送하고, 玄尙彬은 말할 것도 없으니 放送하라 하였다. 尙喆이 領議政 在職時 上奏에 陵寢을 案對한 步數가 비록 或 差遠하다 할지라도 旣是 相望하는 땅인즉 李德澄이 肆然히 偸理함은 크게 變怪에 屬한 것이며, 他人이 犯하지 못한 것을 저가 果敢히 비로소 埋葬하였은즉 一律로서 處斷하여도 다시 疑心할만한 것이 없으나 또 생각건대 이 앞에 류류한 墳塚들을 이미 發覺하지 못함에 因하여 하나도 抵法함이 없었으되 지금 德澄만을 홀로 대벽에 置한다는 것은 朝家의 處置가 너무 斑駁함을 두려원 하오며, 僞贈에 이르러서는 聖敎 이미 分析하여 그 情狀을 얻어 俯詢하는 아래에 다시 對揚할 만한 것이 없음으로 오직 裁量에 의하여 處分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에, 李德澄은 減死하여 刑推 定配하라 하였다. 〔補〕 檀入陵所 肅宗 32年 禁府의 上奏에, 崇陵直長 白以成의 原情公事의 判付內에, 收贖放送하라는 것을 命下하온지라, 律文을 取考한즉 무릇 山陵 兆城門으로 擅入하는 것을 守衛官이 覺察하지 못한 者는 杖 70이라 하였으니 이 律에 依하여 收贖할 뜻을 敢히 上奏한다 하였다. 傳敎로, 允許하였다. 祭享 〔重補〕 祭品不敬 今上 15年 傳敎에, 祭物을 精備토록 申飭함이 屢次일 뿐아니며 매번 命官이 行祀할 때를 當함에 한갖 祭祀하지 아니한 것 같은 歎息이 있을 뿐만 아니라 祭物의 한가지도 敢히 放忽히 할 수 없는 것이며 近來 久任郞官을 特別 差送하여 祭物을 句管하고 檢飭할 것을 定式함이 있었음으로 或 1分 實效있기를 뜻하였더니 이제 준여의 各品을 보건대 昨日 昌陵의 造果는 全然 精誠을 들이지 아니하여 油蜜로 調製할 뜻이 없었으며, 幸行時에 攝行하는 祭享을 이같이 怠忽하였으니 忌辰과 時日의 祭享에, 그 能히 成樣하지 못할 것은 可히 알 수 있는지라 昌陵에 進去하는 典祀官을 爲先 罷職하여 拿問 重繩하고, 熟手도 또한 律에 비추어 痛治하고, 提調는 그 職務를 充分히 履行치 못하였으니 爲先 遞差하고, 久任 郞官을 差出한 뜻이 果然 어디에 있는 것인가 削版의 典으로서 施行하고, 禮曹로 하여금 各 陵·園·墓의 官員等處에 帖文을 下達하여 此後 祭物을 熟設할 때 寢郞과 典祀官은 眼同으로 檢察하여 萬若 不勤한 者 있으면 本曺에 報告하고 本曺에서 곧 草記하되 이같이 하여서도 或 不勤한 典祀官과 寢郞은 同罪로 處斷하고 이로서 齋壁에 揭示하여 常時로 보고 척염토록하라 하였다. 曺草記에 昌陵에, 進去하는 熟手 金聖大·吉龍得·金快等은 爲先 嚴杖 50으로 하고, 律文을 取考하온즉 祭物 1座를 全部 缺한것은 杖 1百으로 하고, 御用의 供奉을 缺한 것은 2等을 加한다 하였으니, 各各 杖 70한 後 徒 1年半 定配하기로 上奏한다 하였다. 傳敎에, 定配는 明日 坐起時에 分揀하고 다시 嚴杖을 加하여 放送함이 可하다 하였다. 同年 傳敎에,各陵의 祭品을 가져와서 建元陵·宣陵·靖陵·溫陵·泰陵·徽陵·元陵의 果品을 奉審하니 다 精備한지라 熟手에 各各 木棉1疋식을 賜給하고, 穆陵의 果品은 가장 精備하였으니 典祀官은 紙 1卷을 賜給하고, 熟手는 米 1斗를 加給하고 順陵의 果品은 缺精하였으니, 熟手를 決杖 50으로하고, 懿昭墓의 果品은 더욱 缺精하였으니, 熟手를 嚴囚하여, 刑判으로 하여금 各別히 嚴杖으로 懲治하라 하였다. 〔重補〕 享祀時刻 今上 11年 傳敎에, 近來 各宮의 享祀時刻을 아직 定限함이 없고 昨日 毓祥宮의 寒食 祭享도 또한 그러한지라, 3更 3點으로서 定限 行祀한다 함은 듣기에 甚히 警悚한지라 當該 獻官은 削職하고, 次知와 中使는 內侍府에서 천명하고, 甚至於 禁漏官員이 祭享時에 또한 待令치 아니하였다 하니, 該 官員은 該曺로 하여금 重治한 後 定配하고, 該吏 및 行首官員은 一體嚴治하고, 今後 各處 祭享을 또다시 이와 같이 한다면 그 不謹한 獻官과 臺監을 마땅히 別樣으로 嚴繩하고, 이 뜻을 禮曺로 하여금 祭享하는 各處의 齋官에게 知委하라 하였다. 曺草記에, 傳敎에 依하여 禁漏官 韓允赫은 嚴杖 1百에 定配하고, 行首官員 李宜稷과 書員 朴枝興은 各各 決杖 1百에 放送한다 하였다. 傳敎에 이미 결혼하였으니 杖刑은 除하여 發配하고, 行首官과 下吏들은 本曺에 移送한다는 것은 卽 兵曺의 誤着이니 아울러 分揀하라 하였다. 各司圖免祭官 〔補〕 今上 14年 大司諫 李崇祐의 所啓에, 享官이 賂物을 써서 免하기를 圖謀함에 있어서 前後의 飭敎가 嚴截 하였으되 司圃署 官員이 오히려 또 冒犯하고 있음은 그 官員에 진실로 罪가 있는 것이나 萬若 吏曺의 吏員이 賂物을 받고 허탈하는 일이 없다면 어찌 官員들이 禁制를 무릅쓰고 圖免하는 擧措가 있으리요. 이는 비록 曺吏들의 從中 弄奸이라 할지라도 이를 檢飭하지 못한 堂郞이 또한 그 責任을 免하기 어려움으로 吏曺의 堂郞은 推考하고, 曺吏는 從重 科治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本曺 啓目에, 祭享色 李仁緝等은 이미 遲晩하였음으로 考律 科罪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圃官같이 빈손하고, 圃貢같이 薄弱하면서도 오히려 또 賂物을 찾고 賂物을 주게되니 雄蔭과 유부에는 반드시 10倍의 弊가 있을지라 일은 마땅히 賄物을 찾는 色吏와 賂物을 받는 郞官은 嚴重히 推治하여 嚴重處斷하여야 할 것이나 짐짓 三令의 뜻을 따라 아울러 嚴刑하지 말고 本律로서 勘放하라 하였다. 〔重補〕 11年 承政院의 啓辭에, 오늘 儀式을 豫習할 때 모든 執事들이 或은 代身 差出하고, 或은 全然 不參하여 誓戒할 때와는 相左하므로 吏曺 堂上을 推考한다 하였다. 傳敎에, 誓戒한 後에 이같이 祭官을 換改함은 이미 極히 駭然하거든 하물며 無端히 탈면하는 類는 더욱 無狀한지라 該吏는 엄핵하여 供辭를 받고, 탈면한 사람은 詳細히 調査하여 論罪하고, 祭官의 差出을 換改한 사람은 草供을 기다려 處斷하라 하였다. 吏曺에서 書吏 安命麟·朴聖浹은 莫重한 享官을 任意로 換易하고, 율연히 탈면케 하였음으로 年限없이 定配하기를 上奏한다 하였다. 傳敎에, 北道로 定配하되 用刑을 기다려 道伯으로 하여금 嚴刑하게 하고 此後 享吏의 犯科는 곧 이 律을 施用토록 이로써 嚴飭라 하였다. 〔重補〕 13年 本曺啓目에, 祭享 色吏들의 弄奸한 情節을 捧供하여 啓聞한다 하였다. 判付內, 다같은 惠郞이면서 홀로 金宗範과 金履中을 宮享에 差送한 것이 또한 그들의 用情함이 아닌가. 惠郞·戶郞 및 有勢한 雄蔭만을 어찌 便近處에 疊差하고 처음부터 循次로 陵祭에 均等하게 差送치 아니하였는가 前後 留意하여 보아 왔음으로 一一히 다 알고 있은 즉 이제 特敎로 嚴問하는 밑에 何敢히 游辭로 發明하는가. 嚴刑 取服하라 하였다. 本曺啓目에, 判付內, 朴聖浹의 所爲는 可謂 罔赦인지라 前番 이러한 일로서 重罪를 屢犯하여도 放還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또 前仕書吏로서 옛과 같이 犯科하였으니 어찌 저 같은 頑民이 있을 수 있으랴. 嚴刑을 準 3次하여 限年없이 定配하고, 金履中은 저의 아들이 近列에 있으니 小心함을 마땅히 他人보다 倍로 하여야 할 터이나 莫重한 享事를 自身의 便苦에 따라 取捨하고, 사람을 놓아 代身하기를 圖囑하다가 이같이 現發되었음은 賂物을 받쳐 圖免하는 者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되 仍하여 不問에 付하고, 本職만을 爲先 刊汰할 것을 吏曺에 分付한다 하였다. 〔補〕 禁府勿差祭官 仁祖 19年 禁府의 上奏에, 本府는 다만 王獄의 重要한 處地일 뿐 아니라 推鞫과 刑殺의 文書에 이르러서 開坐하고 出納함이 없는 날이 없음으로 이로써 祭官으로 差出하지 말것을 일찌기 入啓하여 承傳을 받았으나 近來에 舊例를 따르지 않고 循例로 祭官으로 差出하니, 今日에 刑을 論하고 明日에 受香함은 자못 齋潔과 致誠하는 뜻이 아니므로 今後로는 舊例에 依하여 差祭하지 말것을 다시 承傳을 받음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上奏에 依하라 하였다. 〔重補〕 香路犯馬 今上 12年 左議政 李性源의 所啓에, 今番 秋享大祭의 受香時에 別軍職 朴思弼의 儀仗을 望見하고도, 곧 下馬하지 않고, 屢次로 가벽타가 비로소 橫過하여 隱避한것은 그 所犯을 論한다면 萬萬 駭然하온지라 爲先汰去하고 攸司로 하여금 考律 嚴勘토록 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임금께서, 들르니 極히 駭然하도다. 卿의 所奏에 依하여 하라 하였다. 位 版 位版見失 中宗 28年 原廟의 神版 1位를 亡失하였음으로 사람들은 다 그 下輩들이 殿官을 謀陷하고져 한 것이라 疑心하고, 參奉과 守僕等을 囚禁하라 命하였다. 이를 鞫問할 때 推官 鄭光弼은 이것은 疑獄이므로 期於히 得情키로 한다면 拷掠을 嚴加하여야 하고 이는 반드시 寃濫의 弊가 많으리라 하였다. 上奏하여 이를 緩和케 한 後에, 本曺에서 偶然히 賊人을 掠捕하니 그가 位版을 偸取하여 某山의 巖下에 隱藏하였음을 自服하므로 그 말에 依하여 亡失된 位版을 取得하였다. 位版毁破 宣祖 14年 傳敎에, 鄕校의 位版을 毁破한 者를 檢擧치 못하는 守令은 罷職만하고 安徐하라 하였다. 位版偸竊 肅宗 43年 江華留守의 達本에, 朴 立이 摩尼山神의 位版을 偸出한 事件을 三覆할 때 判付內에, 減死 定配하라 하였다. 宮掖 掖屬勘罪 〔補〕 今上 元年 本曹 啓辭에, 別監 朴有春이 街上에서 酒酊을 부리다가 禁吏에 捕捉되어 官長에게 發惡하고, 吏隷를 毆打하고 甚至於 陞廳 작나코져 하였음으로, 照法 嚴勘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法을 蔑視하고 禁制를 犯함이 이같은 極度에 이르렀으니 前後에 作罪한 情節과 다른 別監들의 不法한 罪狀을 嚴刑으로 捧招하라 하였다. 本曺 啓目에, 朴有春이 刑推한 初招에는 마침내 直告치 아니하고, 判付로 因하여 施威 嚴問한 再招에는, 別監 梁禧昌等 10人이 摠府의 前導들로 더불어 서로 詰亂타가 주먹으로 生打하기에 이르렀으며, 政院에 分付로 因하여 禧昌等 兩漢을 笞罰을 執行하여 直告토록 刑罰하고 이밖에는 다른 所犯이 없다 하고, 判付로 因하여 또다시 訊問한 三招에는, 姜壽大가 靑樓에서 작나하여 家産을 打破하였음을 自房에서 笞治하였으며, 이밖에는 所聞이 없다 하였다. 判付內, 再招供에서 이미 兩漢이 査現되고, 三招供에서 이미 1人이 査治되었으나 또다시 다른 指現이 없었는가 지금 掖隷를 操切하고, 掖庭을 肅淸하는 때를 當하여 문득 決放토록 命한다면 이는 그들이 蔑法하는 行習을 助長하게 되는 것이니 이 뜻으로서 嚴重히 구핵을 加하라 하였다. 四招에, 今番 冬至使를 除拜한 後 大殿別監이 掌務譯官에게 情債를 例捧함이 있었는데 譯官이 다만 10兩을 支給하므로 別監이 30兩을 討索코져 하다가 이로써 爭詰하였으며, 上年 가을 사도사 書員이 例情의 燻造를 주지 않음으로서 左番 掌務와 右番 行首들이 本寺로 달려가서 6兩의 代錢을 討出하였으며, 또 듣건대 今年 봄 崔昌錄이 燻造 6石을 例捧하는 外에, 1石을 加捧하고, 上年 여름 길에서 羅昌兼을 만나 酒家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가 昌兼이 술상으로서 酒母를 醉打하였으며, 上年 가을 金光祐가 술에 醉하여 金姓 內官家에서 작나하였으며, 또 지난 가을에 姜壽大와 더불어 松橋 酒家에 같이 가서 禮曺 書吏 廉哥와 相關하였다 하였으며 이미 이들의 供招을 받아 가지고 入侍하라는 命令이 있음으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 特別히 惟輕의 뜻을 따라 參酌 照律하라 하였다. 〔重補〕 12年 司謁의 手本에, 別監 金鼎相이 란만하게 泥醉하여 畿營에 나가서 休紙를 要求타가 作廳에서 작나한 그 罪狀은 攸司로 하여금 科治한다 하였다. 判付內, 前에 있든 掖隷들이 龍脂次를 稱託하여 畿營에 侵徵하는 弊가 不少하므로 丙午年 以後는 各別히 嚴飭을 加하였기 이 弊端이 永久히 革罷된 것으로 뜻하였더니 이 手本을 보건대 犯禁의 不足으로 또 작나한 擧措가 있고 작나의 不足으로 취후하기에 이르렀음은 그 情狀이 萬萬 痛惡한지라 手本에 依하여 科罪하고, 此後로 또다시 이러한 弊端이 있다면 司謁과 行首는 마땅히 各別히 痛繩할 터이니 이로써 申飭하고 掖隷는 公私를 莫論하고, 三門內에 出入하는 者는, 犯行이 發覺되는 대로 곧 狀聞하되 萬一 掩蔽하여 두었다가 다른 일로 因하여 發現된다면 監司는 掖隷를 交通하는 律로서 論할 터이니 이로써 畿營에 分付하라 하였다. 〔重補〕 今年 政院의 上奏에, 近來 守令이 下直할 때 別監과 中禁들이 食物을 要求하여 甚至於 그 行路를 가로 막어 떠나지 못하게 하는 擧措가 있다 함은 진실로 駭怪한 일이온데 곧 듣건대 原州判官 李太源이 下直할 때 한 別監이 院隷와 符同하여 該守令의 手署를 僞着하여, 行下를 成出하였다 함은 前에도 듣지 못한 일이므로 진실로 極히 痛駭하온지라 院隸는 이미 本院에서 各別히 嚴治되였으나 當該 別監도 또한 懲治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該曺에 出付하여 從重科治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前後 掖隸에 對한 申飭이 莫重하였으나 所犯이 또 이와 같으니 이는 可調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로다. 大抵 掖隸로서 名色한 者는 近來 飭禁의 嚴截로서 除汰한 數를 頻煩히 하여 그들 胸臆의 생각을 行하지 못하게 하였 으므로 문득 化外의 百姓을 만들었음은 진실로 些少한 緣故가 아니라 할 수 있는지라 日前에 肅拜한 일이 있었고, 昨日에 掌務官의 일이 있었고, 또 이러한 擧事가 있으니 오늘의 掖隸는 옛날 保民司를 設置하기 前에 刑曺와 漢城府의 吏隸들이 온갖 奸僞를 다내여 盜賊질을 달갑게 한 事實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痛駭치 않으리요. 事實이 이미 現發되었으니, 嚴治하지 않을 수 없는 지라. 攸司에 出付시켜 各別히 嚴治하여 日後를 懲戒하고, 肅拜時의 事實은 크게 後弊에 關한 것이며, 掌務官의 事實은 渠輩도 또한 사람인지라 반드시 從前의 凶宦輩가 醫官과 符同하여 外朝의 蹊徑으로 通路하든 舊習을 알 것인즉 所謂 掌務官이란 것이 비록 聽塋으로서 平問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어찌 敢히 中官에게 또 말하랴. 이러한 等處를 한번 或 放過한다면 이는 生道에서 殺人하는 뜻은 아니니 該別監 白聖主·李禧謙은 아울러 該 曺로 하여금 杖 1百에 收贖하여 今日內로 發配하고, 當該 司謁도 또한 攸司로 하여금 決杖 收贖하여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 13年 司謁의 手本에, 別監을 藥方에 往來하지 못하게 한 申飭이 截嚴하였으나 別監 金履升은 芙蓉香을 求覓타가 藥房 書院과 서로 爭詰하여 衣服을 破裂하였음은 萬萬 驚駭하므로 該別監을 爲先 除名한다 하였다. 傳敎에, 掖屬이 藥院에 貽弊함을 收拾치 못하므로 御極初에 먼져 이러한 일부터 立法 制定하여 掖屬으로서 藥院에 投足하는 경우에는 罪의 輕重을 莫論하고, 現發되는대로 痛懲하여 10數年來 거의 令行으로 禁止한 效力이 있다 하였으나 이제 이런 일이 있으니 可히 그 法令이 解弛함을 알 수 있는지라 當該 別監은 攸司에 出付시켜 照律 定配하여 後日을 懲戒하고, 行首 別監도 또한 除名하여 該 曺로 하여금 嚴杖한 後 照律하고, 司謁은 汰去하고, 이같이 處分한 後 저들이 또 或 호고감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多角度로 廉探하여 犯者는 該番 司謁과 行首別監을 嚴刑하여 絶島로 定配하고, 이같은 적은 일에 法이 掖屬들에게 施行되지 않는 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러한 判辭를 司謁房과 藥房에 書付하여 此後 藥房에서 進上하는 物種은 掌務官이 待賢門으로 바로와서 傳命하는 司謁을 請하여 入啓하고, 差備別監들은, 藥房官吏들과 接面치 못하게 하고, 擧動時에 香匠이 待令하게 됨은 事勢 不得已한 것이나 또한 多方面으로 廉問하여 萬一 操縱하는 弊가 있다면 現發에 따라 當該 別監은 죽을 때 까지 결혼정배하고, 또한 이 뜻으로서 承旨들을 招致하여 嚴飭하고, 이 같이 分付함에도 藥院에 投足하는 者가 院屬을 許接하는 首醫로부터 그 以下는 또한 마땅히 重治할 터이니 이로써 分付하라 하였다. 〔重補〕 同年 政院의 上奏에, 別監 朴重大가 政府 役處에 突入하여 醉辱하는 말을 監役官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하니 掖吏를 檢束함이 申嚴無比한 터이나 이렇게 朝官을 侵辱하는 據措는 前에도 없었던 일이므로 攸司에 出付시켜 照法한다 하였다. 傳敎에, 이들은 可謂 難化한 무리로다. 梗頑한 慾心을 맘대로 하여 舊習을 改悛치 아니하고 갈수록 더욱 甚하나 이들로 또한 사람인지라 그 所爲를 放任하여 대벽에 빠지게 함은 生物之仁에 어긋남이 있으니 먼저 現發處를 따라 痛治하되 爲先 除名하고, 該 曺로 하여금 嚴杖으로 捧招하고 仍하여 嚴刑을 加하여 照律함을 啓聞하되 現發된 事實이 이미 이같으니 이밖에 어찌 또 저같은 所犯이 없을 줄 알겠는가. 本院에서 各司에 査問하여 이로 하여금 實狀대로 來告케 한 後에 仍卽 事由를 具伸하여 上奏하고, 此後에 또 或 이같은 폐단이 있다면 큰 것은 各其 司에서 草記하고, 적은 것은 該堂이 該房에 말하여 보내어 輕重에 따라 嚴治하라 하였다. 刑曺 草記에 吏卒이 다른 衙門의 官員을 꾸짖어 事理 絶悖한 者는 杖 90에 徒 2年半으로 한느 이律에 依하여 定配한다 하였다. 傳敎에, 알았도다 하였다. 〔重補〕 15年 政院의 上奏에, 掖屬이 敢히 朝士의 家宅에 出入하지 못하게 함은 飭敎 至嚴하고, 法意 峻嚴한 것이나 近日 듣건대 別監들이 帖文을 받는 다는 稱托으로 守令의 家庭을 無難하게 往來한다 하니 蔭武도 진실로 可駭한 일인바 守宰를 侍從하는 무리들이 尋常히 看作함은 이를 査出하여 重勘한다 하였다. 傳敎에, 內外의 禁制를 嚴重히 함은 卽 一部의 金石이거든 하물며 年來 이러한 일을 飭禁함이 어떠한 것인데 저들이 이같이 冒犯함은 萬萬 痛惡한지라 錢貨로 潤己하려는 慾火를 禁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焉敢히 越法하여 紅衣를 입고 法從之家에 가서 帖文을 推索할 수 있으랴. 비록 紅衣를 입지 않는다 할지라도 掖隸로서 이름하였은즉 그 罪가 다를 것이 없거든 하물며 守令으로서 下直할 때 掖屬이 帖文을 要求하는 폐는 年前의 飭禁이 또 어떠하였는가. 이러나 저러나 尋常히 處治할 수 없으니 該 掖屬은 攸司에 出付시켜 嚴重히 懲治한 後 草記하고, 掖屬이 무슨 말을 하든 이를 羞愧스러워 하는 者는 法從인지라 旣聞한 後는 그만두기도 어려움이 있으니 指名 現告된 것은 爲先 罷職하고, 法從도 이같으니 武夫야 무엇을 論하랴. 마땅히 差等이 있어야 하니 現發된 무졸는 아울러 道臣으로 하여금 營門에 拿致하여 從重 決杖할 것을 廟堂으로 하여금 分付토록 하고 此後 文·蔭·武 守令家에 掖隸로서 投足하는 者나 이들의 往見을 接置하는 者는 마땅히 同律로 하고 萬若 掩置하다가 現發된 者는 加等 重勘토록 諸道와 吏·兵曺에 嚴飭함이 可하다 하였다. 〔重補〕 同年 傳敎에, 別監 劉孝哲이 술에 泥醉되여 貞洞 近處에서 작나하고 隅廛에 이르러서는 果實을 掠奪하였다 하니 爲先 枷械를 씨워 嚴囚하고 行首 所任과 當該 司謁은 알면서 卽時 告達치 아니하였으니 推問하여 奏達하라 하였다. 刑曺 草記에 因한 傳敎에 所任 別監과 司謁은 決苔 放送하고, 劉孝哲은 律에 비추어 勘處하되 大明律의 白 에 槍奪하는 律에 依하여 杖 1百에 徒 3年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 毆打掖屬 今上 11年 承政院의 啓辭에, 本院의 引陪 趙景得과 別監 李壽百이 無端히 기뇨하여 처음은 후욕타가 終末에는 주먹으로 毆打함에 이르렀음은 前에도 듣지 못하였고 後弊에 有關한 일이므로 法司에 移送하여 律에 비추어 勘處한다 하였다. 大明律에 무릇 制命을 받들어 出使한 官吏를 毆打한 者는 杖 1百에 徒 3年으로 한다 하였으므로 이 律에 依하여 決杖 定配하였다 〔重補〕 交通掖屬 今上 4年 李東粲은 武藝別監의 母를 毆打하여 傷處가 狼藉하고, 東粲의 妻父인 都監中軍 金相玉은 別監의 父를 軍士로 만든 者를 불러 無事하기를 懇託하였으나 그 査招에 미쳐서는 일이 다 發露된지라. 曺草記에, 東粲은 1次의 刑訊이 懲礪에 足하므로 杖 60에 徒 1年 定配한다 하였다. 傳敎에, 내 每番 嚴重外 三字로서 그 斷斷함을 嫌惡치 아니함은 萬若 이런 防限에 걸린 者 있으면 法으로서 抵罪하여 어떤 饒貸도 없게 하였으니 이는 朝廷에 있는 사람은 다 아는 바이나 今番 李東粲·金相玉의 事件은 일인즉 甚히 微少한 것이나 被害인즉 甚大하고, 무릇 掖隸에 屬한 일은 비록 微細한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먼저 啓達한 後에 狂院한다면 누가 위로 通할 것을 모르리요 마는 이런 昏夜에 密屬하고 掖隸에 轉託하여 無事하기를 周旋토록 말함이 있었음은 어찌 驚駭치 않을 수 있으랴. 이러한 擧措는 진실로 그 無識한 武夫들이 免罪할 뜻에서 急急함인 줄은 알겠으나 몇번이나 말지 않고 馴致지하다가 다시 宦侍를 사귀어 通하려는 行習에 따라 年前의 前轍을 踏襲함은 어찌 름연치 아니하랴. 該曺·該府의 照律에, 徒年으로 磨鍊한 것은 너무 지나친 寬容이니 李東粲은 仍하여 그 配所에서 限年하지 말고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 潛奸宮人 今上 丙申年 傳敎에, 宮禁의 紀綱이 없어진지 오래인지라 宮人으로서 外人을 交通하고 宦侍를 交奸함은 스스로 그 律이 있는 것이며 옛날 明陵朝에 宮人이 이 罪를 犯하여 登時에 正刑되었으므로 此後 宮中의 사람들이 다 法禁을 두려워 하였더니 近來에 와서는 宮人과 宦侍들이 비록 自中임을 알면서도 이러한 負犯이 있고, 이들을 한결같이 掩置하여 或은 闕中에서 해면하는 者도 있고, 或은 長番 中官으로서 寢室의 咫尺인 地域에서 肆然히 行奸하여도 모두 邦刑을 免하므로 지금에 와서는 문득 例事로 여기니 痛駭한 일이 이에서 더 甚할 수 없으며 또 듣건대 夏間에 中官이 所謂 房子인 內人과 潛通하는 者 한둘이 아니라 하니 所謂 房子란 것은 비록 宮人으로 더불어 조금 間隔이 있다 할지라도 그 紀綱을 爲하여 寒心함은 可論할 것도 없거니와 이미 現發된 後는 마땅히 律대로 處勘하여야 할 것이며, 所謂 房子란 것은 慈殿의 所屬이요, 所謂 中官이란 것도 亦是 小宦이라 하니 內侍府에 이들의 이름을 물어 刑曺로 하여금 潛奸한 委折을 各人들에게 嚴刑으로 究問할 것을 分付하라 하였다. 刑曺의 草供內에, 房子婢 福德은 小宦 任應賢과 서로 親하여 房子를 免하고져 나가서 應賢을 男便으로 한 것이라 하고, 應賢의 招內에는 闕內에 있을 때 犯奸이란 實로 曖昧하다 하고, 女婢 古邑丹의 招內에는 內官 李昌仁과 親熟하였더니 主人 尙宮이 逐出하므로 昌仁을 男便으로 하였다 하고, 昌仁의 招內에는, 闕內에 있을 때 實로 犯奸한 일이 없었다 하고, 婢 水點의 招內에는 房子를 免하고져 저의 家로 나와서 宦者 李世聃에게 行媒되어 作奸하였다 하고, 福愛의 招內에는 年少한 所致로서 外間을 出入할 때 金允福이 사랑하여 딸로서 불러 주고 그 後 黃興孫을 男便으로 하여 同居 生活하고 있으므로 允福과 交奸하였다는 말은 千萬 曖昧하다 하였다. 傳敎에 이는 闕內에 있는 宮人으로 더불어 交奸한 것과는 間隔이 있고, 律文을 考覽컨대 宮人이 見汰한 後 外人과 潛奸한 것은 杖 1百에 不過하고, 이제 이 房子와 內人은 이미 見汰한 者이므로 또한 可據할 律文이 없다 하니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렇게 紀綱이 解弛한 날을 當하며 可히 尋常히 處治할 수는 없을 지로다. 刑曺의 滯囚인 中官과 所謂 房子는 이미 1次의 刑을 施行하였으니 特히 惟輕의 典에 따라 今日內로 杖配하고, 그 남어지 中官 金潤福이 男便이니 女便이니 함은 이미 朝家의 至嚴한 法禁이 있거든 하물며 宮中 房子가 어찌 敢히 아니비 딸이니하랴. 비록 潛奸과는 다름이 있다 할지라도 또한 歇治할 수 없으니 徒配하고, 禁府의 時囚인 中官 李世聃은 小官과 中官과 다를 지라도 이러한 犯法한 일이 있고, 그 供辭를 보건대 當初에 招引한 것이 비록 手犯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潛奸에 있어서는 同一한지라 오늘 開坐할 때 刑推를 1次하여 또한 定配하고, 所謂 房子는 該 中官의 律을 보아 勘處할 것을 分付한다 하였다. 刑曺의 草犯에, 各各 杖 1百에 遠地 定配하기로 上奏한다 하였다. 傳敎에, 알았도다 하였다. [重補] 傳敎誤傳 今上 12年 傳敎에, 承旨의 入侍를 이렇게 誤傳하였으되 이에 敢히 彌縫키로 하는 當該 司謁을 汰去하여 攸司로 하여금 科治하고, 萬若 誤傳된 일이 있다면 司謁의 罪를 請함은 前에 定式이 있으되 今番은 詣閤의 還退와는 다르니 비록 請罪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莫重한 入侍의 誤傳과는 同一하거든 하물며 公服을 가추어 下廳한 것과 無端히 還入한 것은 그 무엇이 詣閤과 다르리요. 此後의 誤傳은 비록 詣閤의 還退가 아니라 할지라도 一體로 請罪할 것을 定式으로 申明하라 하였다. [重補] 內侍狂訴 今上 十年 承政院의 啓辭에, 內官이 廳院 下隸들의 侵侮를 當하여 中部官員에게 往復함을 秋曺로 移送한다 하였다. 傳敎에, 該部 官員은 先汰·後拿하고, 該 中官은 內侍府로 하여금 重勘하여 內外의 分을 嚴하게 하고, 下隸와 中官은 스스로 等級이 있는 것인데 辱說을 서로 하였다 함은 진실로 極히 痛駭하거든 하물며 內部와 外司의 分이 至嚴한 것인즉 外司의 下屬으로서 內官에게 焉敢히 接言한다는 것인가. 該 下隸는 攸司로 하여금 照律 嚴治함이 可하다 하였다. 仍하여 傳敎에, 內侍들은 內府에 所屬되어 있으니 무릇 訴告할 만한 일이 있다면 먼저 內府에 올려 入啓 精聞토록 하여 仍하여 朝家의 處分을 기다릴 것이며, 今番 일은 저들로서는 該當 事項을 管掌하는 中官에게 來告하고 內侍府에서는 關係치 않는다 하여 卽時 提稟하지 않는 것은 이는 이리 하라고 시킨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該 中官은 마땅히 嚴重 處斷하고, 이 傳敎를 아울러 廟堂에 下達하고, 廟堂은 法司 및 5部에 分付하여 萬若 內侍府의 轉啓한 文跡을 粘錄하여 來告하는 者 없다면 비록 이일보다 더 크다 할지라도 絶對 敢施하지 말도록 곧 草記하여 諸道에 一體 知悉토록 하라 하였다. 〔重補〕 閣吏推治 今上 15年 內閣의 啓辭에, 閣吏 鄭禮重이 廚院의 兼吏로서 마침 廚院으로 가다가 入直官 李學彬이 그 뜰을 지내면서 拜禮치 않는다는 것으로서 그를 拿入 擬懸하려고 屢次 本閣에 通報하여 반드시 自司에서 處治코져 하므로 禮重을 爲先 除汰하였으나 本閣 員役은 비록 五上司라 할지라도 政院에서는 任意로 推治할 수 없음은 이미 受敎의 定式이 있아온즉 該司 郞官이 제마음대로 졸고하였음은 體統에 有關한 것이므로 推考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傳敎에 大抵 體統이란 것은 紀綱과 等分을 말한 것 같은지라.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凌蔑하고, 吏屬이 官員을 蔑視함은 이 어떠한 傷風·敗俗한 일인가. 마땅히 引用될수 없는 體統을 固執하여 윗사람을 抑制하고 아랫사람 만을 尊重하며 官員을 排斥하고 吏屬만을 擁護하면서 紀綱을 이와 같이 하고 等分을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하면 一般사람이 듣고 보는 바에 本閣의 處事를 適當하다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겠는가. 萬一 兼役이 아니고 한번 犯手하였다 할지라도 廚郞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비록 銀臺 五上司의 官員이라 할지라도 이미 受敎를 違反하였다면 스스로 論責되는 것이나 今番 廚郞의 處事는 이러한 일과는 判異하고, 本役이 비록 閣吏사의 兼役이라 할지라도 廚院에 屬하여 있은 즉 廚吏가 廚郞을 보고 그 뜰을 지내면서 拜禮하지 않았으니 設令 厥吏가 알지 못하고 誤犯되었다 할지라도 吏屬으로시 官員의 顔面을 모른다는 것은 이미 前日에도 듣지 못한 일에 屬하거든 하물며 알면서 故意로 犯行하였으니 그 罪를 더욱 어떻게 處治하여야 할 것인가. 廚郞이 된者 아직 血氣 旺盛한 年少로서 處事를 이미 저같이 그 擁容함을 爾等은 또 어떻게 執言할 端緖가 있겠는가. 그러나 擬打와 擬懸으로서 受敎를 違犯한 것이라 한다면 萬若 이미 毆打하고 또 이미 달아 매었을 때에는 그 論罪할 바를 마땅히 어떠한 律名에 이르게 할 것인가. 堂郞의 等級이 비록 嚴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官下의 分敎와는 같지 않는 것이며 爾等은 內閣의 仙曺로서 提學과 直提學에 짝을 지여 처음에는 上下의 分別이 없다가 校書錄의 諸僚로 더불어 考績에 赴任하는 等의 坐起時에 미쳐서는 恭遜하게 堂郞의 禮를 執行하는 中庶의 사이에 있어서도 烏之雌雄을 分辨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爾等의 閣吏에 내려서이랴, 또 하물며 官下의 區別이 截然히 하늘이 땅과 같음이랴. 또 本閣의 吏隸로서 廚院을 兼營케 하는 法은 또한 備局의 吏隸를 各道 營吏에서 抄上하여 入番케 古例를 模倣함인즉 下番하는 營吏를 監營에서 어찌 罪있음을 敢히 下手하지 못할 理 있겠는가. 邊將은 이미 正科를 行한 出身으로서 貢物 衙門에 仰役하는 者이며, 掖隸는 邸人으로서 隨行하는 者이나 本衙門의 該 守令이 例로 推治할 수 있으니 이것만 홀로 兼帶가 아니란 것인가. 閣吏가 비록 重하다 할지라도 어찌 朝官과 掖隸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또 該 官員의 일로서 말한다면 萬若 各 營門의 例에 依하여 一邊은 進來하고 一邊은 推治하여도 이것 또한 越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下人이 官長을 向하여 犯手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旣遂와 未遂의 區別을 보아 죽이고 살리는 階梯를 判斷하는 것인즉 爾等이 이같이 말한 것은 可하다 하겠는가. 該 官을 推考할 것은 允許치 아니하니 此後 閣吏가 各司에 兼役하여 萬若 참으로 犯罪하는 事實이 있다면 一邊 推治하고 一邊 進來하는 뜻을 定式 施行할 것이며 若或이 傳敎의 라루로 因하여 各該 堂郞이 된 者 平素에 藏畜하였거든 舊念을 一一히 追理 懲治한다면 어찌 閣吏를 爲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閣吏를 또 어찌 仙吏라 하겠는가. 아울러 이 뜻을 다 알게 하고, 所謂 鄭禮重은 除汰하고 끝이는 것은 不可하니 攸司로 하여금 從重 科治함이 可하다 하였다. 寶印 〔重補〕 僞造御寶印信 成宗 24年 申 瀞은 吏曺參判이 抄錄한 佐理勳으로서 應受하는 功臣의 奴婢가 定數에 準하여 이미 나왔으되 高靈縣에 寺奴의 父子가 一道에서 第一富者임을 듣고 이를 圖出코져 하였으나 어떻케 할 計略이 없어서 드디어 御寶를 僞造하고 文字를 發送하여 빨리 現身토록 督促하다가 일이 發覺되어 下獄한지라 임금께서, 每樣 叔舟의 勤勞를 생각하여 그의 죽음을 容恕코져 일찌기 行幸할 즈음에, 禁府의 前路에서 輦을 멈추고 申 瀞을 駕前에 命召하여 諄諄히 下敎하되 너는 大勳臣의 아들로서 지금 死罪에 다았음은 내 甚히 惻然해하니. 네 萬若 實吐하여 悔過한다면 지금 곧 너를 釋放하여 汝父의 勳勞를 酬應하려 한다 하였으나 瀞은 憤慢한 辭色으로 一向 牢諱하였다. 임금께서, 痼執이 迷愚한 人間이로다. 도로 下獄하기를 命하고 禁府로 하여금 언의하라 하였다. 判府事 姜希孟等의 奏達에, 瀞은 몸이 宰相이면서 御寶를 僞造하였음은 法에 있어 마땅히 死罪에 處하여야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따르다. 肅宗 29年 平安道人 車成才·金論先等 印信의 僞造를 아울러 다 承綜하였다. 道臣의 稟啓로 因한 本曺判書 閔鎭厚의 奏達한바, 成才模는 篆文을 模畵하고, 論先은 信印을 造刻하였은즉 그들의 犯情은 全部 容恕 할 수 없는 것이나 大明律 共犯罪의 首從을 區分하는 條에서는, 만약 本條에서 皆字를 말하지 아니 하였으면 首從法에 依한다 하고, 印信僞造條에 皆字가 없는 것은, 法으로 마땅히 그 首從을 區分하야야 한다 하였으니 이로서 말한다면 論先은 從犯에 該當할 것 같으나 이미 造刻을 하였은즉 이가 참으로 僞造한 者이며 事件이 生殺에 屬하므로 敢히 이에 仰達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兩人을 아울러 一罪로서 論斷함이 可하다 하였다. 同年 啓覆할 때 本曺判書 閔鎭厚의 奏達한바, 考覆罪人을 啓聞한 後 비록 或 徑斃되었다 할지라도 그 妻子는 아울러 奴婢로 한다는 것은 일찌기 受敎한바 있었으나 啓覆罪人에 對하여서는 아직 定奪한 일이 없아온지라 今者印信을 僞造한 罪人 朴以道를 結案 啓聞하였으나 미처 正刑치 못하고 이미 物故되었음으로 그 妻子를 永永 奴婢에 屬하는 一款은 어떻게 하여야 하올지 合當한 定式이 있어야 하므로 敢히 奏達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일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各各 所見을 陳達하라 하였다. 右議政은 强盜로서 徑斃된 者의 妻子를 奴婢로 함은 이미 定式함이 있은즉 지금 이 印信을 僞造한 罪에 對한 律文이 甚히 嚴함으로 强盜로 더불어 異同이 없는 것 같은지라. 그러나 强盜로서 徑斃된 者의 妻子를 奴婢로 함은 一時의 所定에 不過하므로 이로서 一切 施行함은 不可하다 하였다. 임금께서, 啓覆하는 罪人은 반드시 正刑을 기다린 後에 그 妻子를 奴婢로 할 것을 定式함이 可하다 하였다. 英宗 14年 右議政 宋寅明의 奏達한바, 日前 關西 民人이 當局에 來訴하되 宮房으로 더불어 相訟타가 意外로 捕廳에 發捕 囚禁되었다 하므로 從事官에게 물은즉 內司에서 關西 民人의 訟案中에 印跡이 模糊함으로써 印의 僞造라 하여 手本의 啓下로 發捕하게 된 것이나 所謂 印의 僞造라는 것이 別로 現捉할 만한 事實이 없음으로 京兆에 移送하였다 하니 비록 訟理의 曲直은 몰을 지라도 久遠한 文書에 印跡이 分明치 못한 것을 억지로 印을 僞造 誣罔한다 하여 手本을 捕廳에 啓下하였으니 久遠의 文書를 가진 者는 能히 罪를 免치 못할 것이므로 臣으로서 內司手本을 올린 官員은 攸司로 하여금 推治하여 後習을 懲戒하옴이 可할 것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依하라 하였다. 35年 傳敎에, 나는 印信 僞造의 處決에 있어서 尋常히 耿耿함이 있는 것을 지금 이 暮年에서 어찌 諭示하지 않으리요, 大抵 印信 僞造에 對한 律은 本來 大明律이 아니고 大典에 있는 것이나, 或은 印文없이 成案한 것을 대벽에 두는 者 있으니 曾前에 이러한 律은 비록 傳生한다 할지라도 萬若 或 差違된다면 人命이 어찌 重하지 않으랴. 또한 大典의 本意가 아니니 此後 京·外 法官은 成案할 때 그 마땅히 審愼하여야 할 것을 秋曺와 捕廳에 申飭한다 하였다. 39年 御寶를 僞造한 罪人 金希文과 申重輝等을 結案한 本曺啓目에, 判付內, 御寶를 僞造한 사람은 特히 希文 한사람 뿐아니라 擧皆가 杖刑을 참고 不服한 것이로되 홀로 希文은 踰日하지 말라는 嚴飭에 因하여 直招로 結案되었으니 外面으로는 비록 快할 것 같을지라도 이 快라는 한 글字가 마음을 恒常 警戒하는 바이며 萬若 그 快로 因하여 홀로 希文等에만 施法한다면 마음이 不忍함이 있는지라. 옛날 唐나라 太宗時代에 4百名의 罪囚를 釋放함에 先儒들은 비록 잘못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 하겠노라 슬프다 저 4百名의 罪囚들이 全部 대벽이였으나 4百名의 대벽도 오히려 一時에 釋放하였거든 하물며 2名의 罪囚이랴 昨日 判付할 때 이미 나의 뜻을 諭示하였으니 저들은 비록 듣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 어찌 마을을 속일 수 있으랴. 特히 一律은 減免하고 아울러 絶島로 定配하라 하였다. 40年 京城居住인 朴萬과 金賢中은 御寶를 僞造하여 紅牌를 潛賣타가 捕廳에서 本曺로 移送되어 추위 不服하는지라 癸巳 5月 萬春의 14歲 어린 딸의 上言에, 저의 父는 紅牌의 買賣를 指示함에 不過하였으나 賢中의 誣援으로 因하여 捕廳에서 저의 父를 推問하고, 저의 父를 捉去하여 周牢에 이르렀음으로 저의 父는 不得已 誣服하였다 한다. 本曺判書 具允明의 回啓에, 勿施한다 하였다. 同年 8月 萬春의 딸은 또 上言하였다. 傳敎에, 지금 順愛의 上言을 듣건대 그 眞僞를 莫論하고 슬프다 저 周牢는 何等의 酷刑이냐 그 아비에게 施刑하여 脅迫 捧招코져 하는 이러한 일들이 마음에 恒常 愍爲하므로 일찌기 下敎하였으며, 果然 그 駭然함이 이같으니 該曺로 하여금 그 捕校를 嚴問하라 하였다. 本曺에서 捕校 李 基와 捕吏 廉興保를 推問하고, 또 律官 李彦春으로 하여금 살펴본즉 施威한 痕跡이 있음으로 이로써 覆啓한다 하였다. 判付內, 周牢와 결혼은 先後를 莫論하고 그 施刑은 같은지라 그 아들이 비록 囹圄에 있다 할지라도 그 아비의 소리를 듣고 어찌 誣服하지 않겠는가. 朴萬春은 特히 參酌하여 放送하고, 順愛는 14歲 兒女로서 能히 이를 辨明하였으니 該廳으로 하여금 米布를 賜給토록 하라. 鳴呼라 몇 百年 所用하든 亂杖을 그 能히 除去하였으되 周牢의 刑도 그 또한 酷하도다. 施威에도 오히려 그 痕跡이 있다 하니 萬若 施刑한다면 어찌 特히 그 痕跡뿐이랴. 옛날 漢나라 제영이 이르지 않었는가. 刑이란 것은 再次 繼續할 수 없다 하였으니 鳴呼라 桁楊의 밑에서는 무엇을 求한들 얻지 못하랴. 捕廳의 軍官들은 金玉을 希望하여 無辜한 者도 한번 들어간 後는 어떻게 그 이름을 免하랴. 저들이 그 비록 金玉을 希望함이라 할지라도 또 어찌 陰德이 있을 손가. 비록 捕廳이 그렇다 할지라도 年少한 營將들이 尋常히 悶然함은 昨日 尹光鼎의 事件을 듣고, 그의 證驗을 이미 보았도다. 슬프도다 오늘 이 下敎에 萬若 動心하지 않는다면 그 어찌 곤수에 으르렀는가. 이로써 諸道에 申飭하라 하였다. 〔重補〕 今上 元年 均役廳의 移文內에, 巨濟와 熊川의 魚鹽을 管掌하는 監官을 差定한 關文을 朴斗杓가 僞造 賣食타가 捉去되어 엄핵한다 하였다. 刑曺의 奏達에, 朴斗杓는 松木으로서 印跡과 關字를 刻成하였으며, 大典에, 印信을 僞造한 者는 斬刑에 處한다 하였으니 朴斗杓는 右律에 依據 施行한다 하였다. 判付內, 元犯 朴斗杓의 招辭에, 긍경이 專혀 所謂 兩班에게 있다 하고, 初招, 三招 四招에 이르기 까지 다 兩班의 所爲로서 納招하니 所謂 兩班및 應問하는 各人을 다시 엄핵하라 하였다. 刑曺 奏達에, 朴斗杓는 吳海昌으로서 立證하였으나 海昌의 自決은 朴斗杓가 就捕된 며칠 內에 있었은즉 그 所犯이 있었음은 昭昭하여 掩避하기 어려우며, 海昌이 身故한지 해가 지난 後에 鄭 浹과 趙 儒라는 이름이 처음 發覺되었으나 頭面할 길이 끊어 짐에 辨明할 길이 없는지라 元犯을 歸一시키기 前에는 斗杓를 加刑할 수 없음으로 鄭 浹과 趙 儒를 加刑 得情한다 하였다. 判付內, 獄情이 오직 海昌에게 있었으나 海昌은 事件이 發覺된 後 徑先 縊死하였은즉 斗杓와 鄭·趙 兩姓人을 莫論하고, 實로 빙핵할 道理가 없으니 生道에 付하는 것도 또한 罪疑하는 義인지라 朴斗杓, 鄭 浹·趙 儒는 아울러 特히 參酌 定配하라 하였다. 〔補〕 2年 平壤人 車京保는 內侍付 印信을 僞造하였음으로 道臣 金鐘秀의 査啓에, 因한 本曺判書 蔡濟恭의 回啓에, 삼가 大典의 僞造條를 按察하옵건대, 印信을 僞造한 者가 印文을 비록 이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處斬한다 하였으며, 內侍는 本來 印信을 使用하는 衙門인지라 京保는 그 아들이 內侍에 出入함을 憑藉하여 保率의 帖文을 僞造하여 役價를 捧食하였은즉 設或 그의 所供과 같이 初頭의 所造는 비록 數三劃만 삭이고 篆形은 만들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印信을 僞造한 律은 免하기 어려우며, 그 供辭를 보고 그 本情을 考察하온즉 京保는 鄕曲의 蠢氓으로서 다만 宮房의 次知들이 行用하는 圖署만 보고 內侍府에 印信이 있음을 알지 못하여 敢히 僞帖 捧價하는 計策을 내어 初次에 造作한 바는 이미 圖署라하여 所刻한 것은 數三劃에 不過하고, 再次로 所踏한 것은 他人의 套署를 竊取하여 종이 張板으로서 圍圈을 添作하여 帖文에 찍은 것이며, 또한 圖署로서 찍었음을 自認함은 처음부터 印信을 僞造하려고 뜻을 둔 것이 아니온즉 그 僞印에 有意하고 그 僞印에 設心하여 篆文을 未成한 者와는 差間이 없지 아니하오며, 그 本情을 推究하오면 僞印할 마음이 없었고, 그 造作한 바를 보건대 印信의 形態가 아니온즉 僞印한 律로서 直斷함은 原情의 뜻이 아닌 것 같고, 內侍付는 乃是 印信을 行用하는 衙門이나 이미 僞圖署로서 內府의 僞帖에 찍었은즉 이는 遠配의 典으로서 施行함이 適當할 터이나 重獄에 屬生으로 敢히 擅便할 수 없어 上裁를 받고저 하오며, 買帖人 金玄光等 4人은 全部 無識한 愚民으로서 속아서 買得한 것이나 道臣이 이미 嚴刑하였으니 다시 可論할 것도 없거니와 李 緯에 이르러 서는 兩次로 帖文 및 關字를 저가 書給하였은즉 서로 結托하여 共謀한 情跡은 明白히 掩避할 수 없음으로 1次의 嚴刑은 徵罪로 不足함으로 道臣으로 하여금 嚴刑하여 放送토록 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依允하되 車京保는 足히 原恕할 端緖가 있으니 道臣으로 다시 嚴刑을 加하여 減死하라 하였다. 〔重補〕 同年 京居人 박선은 黃蠟으로서 御寶와 印信을 僞造하여 空名帖을 假作하고 放賣타가 捕廳에 被捉되어 本曺로 移送한지라. 本曺 奏達에, 박선을 지금 結案함에 있어서 前日 供辭를 一變함은 金希天에게 見誘되어 納招한 것임으로 嚴刑 取服한다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甲辰年 本曺 奏達에, 寶跡을 찾아준 者는 希天이요, 篆形을 색인 것은 박선인지라. 希天은 酌放한 後 身故하였은즉 박선은 減死할 수 없음으로 前과 같이 加刑 取服한다 하였다. 判付內, 그 情狀은 卽 故意 犯行이 아닐 수 없으며 正犯은 希天이 아니라 卽 박선인지라. 希天의 徑斃가 박선의 償死에는 無關한 것이나 一獄의 兩囚를 殞命케 함은 마침내 審克하는 方途에 乖常함이 있게 되고, 僞獄의 首從은 殺獄의 首從으로 더불어 大差가 있는 것이며, 그 情跡을 잡아 推究하면 故意로 犯行한 것이 아님이 없고, 正犯아님이 없으나 다만 두 僞造者를 質辨시키고 따라서 또 그들의 面稽하는 말을 듣고 또 그들의 犯行을 더 疑心할 것이 없는 端緖를 얻은 然後에 비로소 用法을 말할 것이로되 이 獄事는 비록 對質코저 하여도 證據가 이미 끊어지고, 또 對質할 길도 끊어졌으니 萬一 그 奸惡한 犯行을 거둘 수 없음으로 因하여 獄中에서 處死케 한다면 이 어찌 獄情을 愼重히 하고, 刑罰을 欽恤하는 義理라 하겠는가 1次 加刑하여 減死 島配하라 하였다. 〔補〕3年 京人 鄭氣淳은 尺文을 僞造하였음은 本曺에서 그 結辭를 完結하였다. 印信을 僞造하였음은 그 節次를 비록 价川 李泰浩에게 추위코저 하였으나 价川 1郡에는 本來 李泰浩란 姓名이 없었은즉 氣淳이 死中에 求生하는 方途로서 無를 가르켜 有를 말한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며, 獄情으로서 論한다면 더 疑心할만한 것이 없음으로 請컨대 加刑 取服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그 所犯을 推究하면 容恕할 수 있는 것이고 僞印한 情跡은 아즉 明證을 얻지 못하였은즉 僞造의 律로서 直斷함은 자못 審克하는 道理가 아니니 次律로서 酌處하라 하였다. 〔補〕 4年 本曺 啓目에, 罪人 金處恭·朴壽命等을 捕廳에서 추핵할 때 處恭은 御寶를 僞造한 空名帖을 散賣하였음을 自服하고,壽命은 處恭과 더불어 印信을 같이 색였음을 自服한 것으로서 本曺에 移送된지라. 處恭은 金就瑞에게 추위하고, 壽命은 다만 賣帖하였을 뿐이며 實로 印信을 圖刻한 일은 없다 하고, 金就瑞는 以前에 이미 物故되었음으로 對質 할 수도 없고 다만 處恭은 지금 나이가 19歲이니 이는 再昨年 17歲 때의 일인지라. 印寶의 僞造는 決코 치애한 아해의 獨辨할 바도 아니며, 비록 處恭의 外從兄인 兵吏 安壽益의 招辭를 볼지라도 叱責하는 말이 다만 處恭의 父 麗澤에게만 미치고 處恭에게는 미치지 아니하였은 즉 麗澤이 窩主 되었음은 可히 알 수 있으며, 賣帖人 朴仁昌이 또한 麗澤에게 卽接 買受하였다 하나 麗澤이 한장을 거저주어 그 勞苦를 報酬함이 있었다 한즉 麗澤이 主動하여 賣帖한 것도 또한 알 수 있으며, 壽命에 이르러서는 元來 處恭 父子의 隨從인지라 重刑을 怯거여 同刻으로 誣服함은 어떤 다른 일이 아니며, 지금에 와서 麗澤은 이미 死亡되었으니 빙핵할 階梯가 없아오나 處恭과 壽命이 이미 捕廳에서 承款한 案이 있음으로 請컨데 嚴刑을 加하여 期於히 輸情한다 하였다. 判付內, 그 獄案을 보고 詞證을 參考함에 可히 疑心할만한 端緖가 없지 않도다. 저가 捕廳에서는 承款하고, 本曺에서는 變辭하여 忽然히 또 金就瑞에게 추위한 것은 獄老生奸에 말미암은 것 같고 저 어린 아해가 獨辨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卿等은 事理에 正合함을 論列하였으나 나의 뜻으로서는 저 아비 麗澤의 同情하는 痕跡이 이미 各人의 招辭에서 發見되고, 또 스스로 裁作한 擧事가 탄로되었으니 가령 저가 果然 首犯이라면 저 아비가 1室에 같이 있으면서 알고도 禁하지 아니하였음은 可히 元犯으로 斷定할 수 있거든 하물며 致疑한 麗澤은 이미 死亡되고, 被告된 就瑞도 物故되어 憑査할 길이 없으니 惟輕에 合置하여 金處恭은 減死 定配하고, 隨從 朴壽命도 또한 減死 定配하고, 그 始末을 考察할 때 그 根本을 저지른 것은 卽 安壽兼이로다. 저는 政吏로서 多年間 隨行하면서 每樣 이러한 手段에 慣熟되어 저의 舅夫와 저의 所從이 欺人藉賣한 것은 저가 꾸민 計略이 않일 수 없거든 하물며 本事件은 어떠한 等類의 極律인가 귀로서 僞造하는 變을 듯고, 눈으로서 僞造한 物件을 보고도 다만 叱責하였을 뿐 能히 痛禁치 아니하여 이 地境에 이르게 하였음은 비록 同一한 心腹이라 하여도 可한 것이니 安壽益을 各別 嚴刑하여 遠地에 定配하라 하였다. 〔補〕 同年 本曺 啓目에, 罪人 鄭弘大는 御寶僞造와 印信僞造가 이미 現捉되고, 前後 斥賣한 僞造帖文이 또 26張이 된다 한즉 그 金道弘으로 더불어 符同 僞造한 것은 實로 發明할 道理가 없었으나 捕廳에서 推捉하는 날에 도타하지 아니하고 곧 來現하였은 즉 대개 그 根本이 元犯않임을 볼 수 있고, 그 僞寶와 僞印을 捕廳에서 現捉한 것이 아니고, 그 陳告로 因하여 搜來한 것인즉 이는 欺隱하였다가 被捉된 것과는 有異하고, 또 人子로서 爲父하는 心情은 마땅히 異同이 없는 것임으로 진실로 僞造인줄 안다면 決코 그 아비의 이름을 그 帖文에 서진하여 이로써 欺瞞하는 方途로 하지는 않었을 것이나 홀로 初招中에는 金道弘의 病時에 그 僞寶와 僞印을 發見하고 갖어왔다 함은 이는 有意에서 갖어온 것이며, 再招中에는 金道弘이 죽은 뒤에 什物을 태래하다가 그 下方의 刻劃을 보고 비로소 印信임을 알았다 함은 이는 無心히 태래한 것인지라. 다만 初·再招가 相左됨이 有意와 無心한 사이일 뿐아니라 다른 隱情이 있는것 같음으로 請컨대 加刑 得情한다 하였다. 判付內, 獄의 事體 비록 重하다 할지라도 情狀은 可히 容恕할만 하니 邊遠으로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 同年 京城罪囚 朴聖梁은 御寶와 官印을 僞造하여 增資帖을 찍어내여 京鄕에 散賣한 것이 合하여 150張이며, 木으로 만든 僞寶와 僞印이 捕廳에 見捉되어 捕廳에서 本曺에 移送함으로 本曺에서 이를 完決한지라. 聖梁이 敢히 死中에서 求生하는 計略을 내어 이미 死亡된 安命寬에게 그 事實을 추위하오나 許多히 買帖한 사람은 한사람도 일찌기 安命寬의 面目을 보았다는 者 없거든 하물며 僞寶와 僞印이 그 집에서 現捉되었은즉 聖梁이 손수 僞造한 것은 明白하여 疑心할 것 없다 하였다. 判付內, 僞造帖文을 發賣함이 極히 狼藉하여 그 數가 이같이 많음에 이르렀으니 그 情跡을 推究한다면 한 때의 貧窮한 所致가 아니며, 대개 積年 秘密히 居置하여 문득 저의 집의 産業으로 하는 者이니 萬萬 흉녕하고 捕廳으로 부터 移囚된 後 忽地에 供辭를 變更함은 모든 罪囚들이 求生하는 例習을 본받은 것 같으나 저의 所犯로서 焉敢히 이같이 하랴 萬若 또 抵賴한다면 처음 取服할 때의 例의 依하여 盤問치 않을 수 없으니 이 뜻으로서 各別 嚴刑하여 期於히 得情하라 하였다. 庚戌年 刑曺 奏達에, 判付內, 한번 犯行도 마땅히 處斷하거든 하물며 屢次의 犯行이랴. 1度이라도 마땅히 죽이거든 하물며 百度이랴 赦는 赦대로 法은 法대로 이니 此等漢을 日次로 訊推함은 例判의 酬應만을 煩遽롭게 할 뿐이니 그 可히 나라에 法이 있다 하겠는가 後日次는 尋常을 排除하고 嚴刑으로 仍하여 直招를 받아서 奏聞하되 萬若 또다시 前日 例推와 같이하여 또 例判하기를 請한다면 저같은 法曺는 將次 어디에 쓰겠는가 卿等도 重勘을 免하기 어려울 터이니 이로써 다 알게 하고, 이를 탕념 엄핵하여 萬一 直招를 받거든 格式대로 照律할 뜻으로서 措辭 回粘하라 하였다. 本曺 奏達에, 判下하였다. 엄핵하는 밑에 聖梁이 敢히 粧撰하지 못하고 實狀대로 遲晩하였음으로 詳覆 施行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一律이란 하나 뿐이라 殺人者의 償命에 比較하여서는 스스로 輕重이 있을 것이며, 不待時에 이르러서는 더욱 曠蕩하는 이때에 可論할 것도 아니며, 安命寬에 추위함위은 비록 死囚로서 國生하는 말 같기도 하고 또한 한번 구핵할 만한 事端이 된다 할지라도 어디 있는 命寬을 어디서 喚出하겠는가 이러나 저러나 次律로 施用하여 法에 太屈되지 않도록 하여 尋常히 啓覆하고, 이러한 罪囚에도 或 生典을 傳與할 수 있거든 하물며 曠蕩하는 이 때이랴 朴聖梁은 準 3次 加刑하여 畿島 永永 奴役에 充定하라 하였다. 5年 蔚山人 姜太國과 趙厚邑氏는 左兵營의 印信을 번각하여 帖文 을 僞造하여 金元三等을 공혁하여 錢兩을 徵出하였음을 道臣의 稟啓로 因한 本曺判書 徐浩修의 啓目에, 그 罪犯을 推究하오면 實로 一律에 合當하오나 推官의 報辭와 道臣의 結辭에서 僞印의 刻劃이 有橫 無竪이라 하고 先朝 戊寅年에 印文없이 成案된 것은 京·外 法官은 그 마땅히 審愼할 것을 受敎하온지라 首從를 莫論하고, 마땅히 參量하는 道理가 있어야 할 터이나 이는 대벽에 屬하여 敢히 擅便할 수 없음으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 所謂 僞印의 篆劃이 不明하고 印文이 未詳한 것은 이미 先朝 戊寅年 受敎가 있었으니 欽恤하는 盛意를 仰體하여 오직 首從의 輕重을 區分하여 決配하라 하였다. 同年 大丘人 殷思默이 把摠帖을 僞作하되 平凉子의 破片으로서 模樣을 만들어 踏朱하였음을 道臣의 稟啓에 因한 本曺判書 徐浩修의 啓目에, 平凉子의 破片은 이미 刻劃을 僞成한 者와는 有異함으로서 道臣의 啓辭에 依하여 惟輕의 典으로서 施行하옴이 審克하는 道理에 害롭지 아니하므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 帖文의 僞造는 僞印으로 더불어서도 間隔이 있거든 하물며 그 帖文에 찍힌 바가 또한 印跡이 아니고 平凉子의 破片으로 模樣만 만들어 印朱를 발라 찍었음에 不過하니 이는 蔚山 姜太玉의 比가 아닌지라 다시 嚴刑을 加하여 參酌 決放하라 하였다. 同年 大丘人 南慶老와 최상崙等이 印信을 僞造하였음을 道臣의 稟啓로 因한 本曺判書 金魯鎭의 啓目에, 貨財를 취감이 數千에 達하고 그 流毒이 자못 一道에 둘리었음은 그 罪狀을 論하오면 다 罔赦에 屬한 것이나 元來 一獄에 두 元犯의 規定이 없는 것이며 마땅히 首從을 區分하여야 함으로 續大典 僞造條에는, 印信을 刻造한 者와 篆文을 模劃한 者는 一律로서 論한다 하고, 大明律 僞造條에는, 印信 僞造에 爲從者는 1等을 減한다 하였으니 排布 造謀함은 비록 尙崙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模刻을 主張함은 專혀 慶老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니 慶老는 前과 같이 推問하고, 崔尙崙은 次律로서 酌處하여야 할 터이나 獄體 至重하므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內, 模刻를 主張한 罪 첫째도 尙崙이요, 둘째도 尙崙인지라 이제 手刻與否로서 首從을 徑定함은 率爾의 嘆이 없지 아니하여, 獄案을 仔細히 보고 兼하여 모든 招辭를 閱覽컨대 尙崙이 正犯됨은 알기 어렵지 아니 한지라. 篆劃을 刻出할 즈음 尙崙의 손에 따라 指揮되었음은 慶老의 發明하는 말을 기다릴 것도 없거니와 同謀人의 招辭에도 또한 그러한즉 이러나 저러나 尙崙은 決코 輕易하게 酌決하기 어려운 것이며, 또 지금 京·外의 牟利輩들의 奸弊가 날로 불어나는 이 때 尙崙같은 者가 살아서 獄門을 나오게 된다면 다른 後弊를 懲礪할 수 없으니 道臣으로 하여금 用刑하기를 기다려 各別히 嚴刑 得情하고, 慶老는 서투른 刻出하는 才致가 있다하나 도리어 匠手의 일을 본뜬 것이니 이는 隨從에 付하여 失刑에 이르지 않게 하고, 遠外에 있는 獄情을 遙度하기 어려우니 또한 道臣으로 하여금 意見을 내어 論理 狀聞한 後 稟處하라 하였다. 庚戌年 別諭에, 嚴刑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 8年 京城罪囚 高大昌이 僞帖을 斥賣한 것을 刑曺에서 完決하고 僞造의 1款 韓壽益에게 추탁하므로 嚴刑得情한다 하였다. 判付內, 僞造의 1款을 이미 死亡한 韓壽益에게 추탁하니 그는 추핵할 길이 없는지라. 이 罪囚는 設或 共謀한 痕迹이 있을 지라도 獄情의 事體로서 揆察할 때 元犯으로 勒定할 수는 없는 것이니 昌大는 嚴刑하여 減死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 同年 京城罪囚 김중흡은 印信을 僞造하고 內奴에 減貢하는 完文을 假成한 事件을 本曺에서 完決하였다. 중흡은 本來 閃忽한 漢(놈)으로서 奸細한 무리들을 광위하여 印信을 僞造하고 完文에 亂踏하여 金光倫을 慶州로 下送하여 或은 營裨라 稱하고,或은 札鎭이라 稱하여 財物을 憑取하고, 이밖에 風落木의 發賣와 陳荒處의 起耕等設이 專혀 중흡의 입에서 나왔으며, 僞造 1款은 金光倫이 비록 自服은 하였으나 光仁과 光倫은 都是 중흡에게 피위된 所致임으로 이들을 嚴刑 輸款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寶印 或은 關帖을 莫論하고 僞造는 대개 飢饑를 견디지 못하여 罔赦한 罪科를 冒犯한 것이니 設或 法대로 正刑할 지라도 朝家는 여기에서 문득 哀矜하는 마음이 있어서 일찌기 그 情實을 얻음으로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罪囚에 이르러서는 十條로 斷案하면 百惡이 俱備되어 京鄕에 出沒하여 閃忽한 그 行止는 或은 風落松 發賣를 稱託하고, 或은 陳荒處를 起耕한다 하고, 或은 奴貢의 減疋을 圖謀하고, 或은 印跡의 加書를 犯하고, 虛僞의 文券를 憑籍하여 많은 賂物을 암험타가 비로소 鎭營에서 惡刑을 받고, 本曺에서 遠配를 입게 되며, 宿習을 改悛치 아니함에 신얼이 오히려 譎計를 자아내고, 或은 名子를 變改하고, 或은 諺書를 模幻하고 萬戶의 妾父라 自言하고, 嶺營의 親幕이라 冒稱하여 甚至於 手決의 僞造가 不足하면 傳令을 僞造하고, 傳令의 僞造가 不足하면 畢竟 完文을 盜成하고, 印信을 假作하는 擧措에 이르게 되어 이 許多한 罪犯에서 或 한가지만 있다 하여도 저 어찌 三尺을 벗어나겠는가. 하물며 여러가지 罪犯이 兼하여 있음이랴 設使 저의 供辭와 같이 完文에 所踏한 印信은 저의 手造한 바가 아니라 할지라도 前者 모든 文券의 僞造를 또한 光倫에게 추위하는 罪人 김중흡은 各別 嚴刑하여 이에 速히 遲晩을 받아 律대로 勘斷하고, 干連된 金光仁은 捕廳의 招辭와 刑曺의 供辭에서 끝까지 그 동생에게 참아 허물을 돌리지 못함은 可히 本然의 義理가 泯滅치 아니함을 보았으니 오늘 開坐時에 光仁을 招致하여 判付의 辭意를 宣布한 後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 9年 鐵山 李浩軍이 印信을 僞造한 事件을, 道啓에, 松脂로 만든 僞本을 이미 現捉함에 贓犯의 實績이 탄로되고, 手書와 手刻은 저 이미 自服하였음으로 法에 依하여 考覆한다 하였다. 刑曺 回啓에 判付內, 盜印한 것은 1張에 不過하고, 賂物로 받은 것은 다만 百文에 그치었으며, 自刻 自銷한 것도 또한 兩日內에 있었다 한즉 이 擧措는 자못 희획에 가까운지라. 이를 置法함은 좀 지나치는 일이어서 特히 欽恤의 義를 따라 浩軍은 嚴刑하여 減死 島配하라 하였다. 同年 安州 金應秋가 印信 反踏한 事件을, 道啓에, 印文은 비록 反踏되었다 할지라도 行兇은 이와 같이 狼藉하다 하였다. 刑曺回啓에, 僞造 帖文이 16張의 많은 數에 이르고, 買賣한 것은 자못 數郡에 퍼졌으니 潑水로 反踏하여 印紙를 模劃하였음은 依例 格式을 가추어 啓聞한다 하였다. 判付內, 面紙에 朱帖한 것은 弄假成眞이요, 먹으로 手決을 模倣한 것은 張虛爲實인지라. 그러나 奸謀로 愚民에게 暗賣하여 僞造帖文이 자못 隣邑에 까지 퍼졌으니 그 情狀을 論한다면 어찌 當律을 免하리요 近日 大明律 詐僞 制書條를 보건대 6部 文書를 詐僞하여 押字를 套劃하고, 印信을 盜用한 者는 杖 1百에 流 3千里라 하였으니, 卿等이 말하는 刻造 模劃의 律이란 친착한 것인지 알 수 없도다. 移踏한 것은 이의 僞造와는 有異하고, 假押한 것은 또한 套劃과는 間隔이 없음으로 이와 같은 獄囚는 罪疑의 科에 付하는 것이 欽恤에 允合하나 應秋는 大明律에 依하여 勘放하라 하였다. 〔重補〕 13年 京城罪囚 민사육이 御寶 僞造한 事件을 刑曺에서 完決하였다. 사육은 御寶의 篆文을 模刻하여 紅牒에 踏出하여 恣意로 賣買한 情狀을 捕廳에서 推問할 때는 箇箇 承款하였으나 本曺에 移來하여서는 敢히 掉脫할 計巧를 내어 白地에 形影이 없는 李德咸에게 추위하여 비록 生出코져 함이라 할지라도 그 光雲等의 立證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屢次 訊問한 後에 미치어서 비로소 모든 情狀의 呑吐를 알게 되므로 加刑 輸款한다 하였다. 判付內, 더 嚴刑을 加하여 期於히 輸款하라 하였다. 刑曺 啓目에, 민사육은 御寶를 僞造하고 紅牌를 假作한 情節을 一向 抵賴함으로 加刑 得情한다 하였다. 判付內, 加刑 取服하라 하였다. 庚戌年 다시 調査하여 刑曺 奏達하였다. 判付內, 共謀한 사람은 많으나 造謀한 者는 卽 민사육인지라. 御寶를 僞造함은 진실로 어떠한 限界인가 저같이 痛惡한 情狀은 일찌기 보지 못한 바이며 御寶를 僞造한 類로서도 印篆이 分明치 아니한 者는 容恕를 받게 되는 바 篆績이 木도 아니오, 匏도 아니오, 瓦도 아니오, 蜜도 아니며, 菁根으로서 刻出한 者도 또한 當律을 施用하게 되는가 菁根은 卽 生菜인지라 決코 오래도록 朽傷하지 아니할 理 없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贓物을 捕捉하는가 萬若 贓物이 없다면 또 受敎에 違背됨이 있는 것이니 곧 盤問하여 論理 回粘하라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菁根은 비록 痕跡이 없다 할지라도 柏木으로 그 犯生의 實績을 잡았다 하였다. 判付內, 菁根은 비록 溝中에 投入하였다 할지라도 木片은 犯贓의 實績인 것이니 저가 이 獄事의 元犯임을 어찌 가환하리요 그러나 德咸과 光雲을 같이 面質시키기 못하였 은즉 輕率하게 一律을 施用함은 또한 刑政에 關한 것이니 다시 論理 議處하라 하였다. 刑曹의 回啓內에, 做出한 德咸은 이미 形影이 없는 것이며 酌配된 光雲도 또한 可問할 것이 없아온즉 究竟의 無期함은 진실로 聖敎와 같다 하였다. 判付內, 溝中에 投入한 菁根은 썩은지 이미 오래이며, 木片의 去就는 光雲만이 아는 것이나 이미 酌配되고, 所謂 德咸이란 者는 卽 元犯으로 추위하든 漢(놈)이나 捕捉도 못하고 形影도 없다 하니 그렇다면 민사육은 將次 죽이거나 살리거나 間에 出場할 期限이 없게 되고 요즈음 卿等의 覆辭를 보건대 이미 容恕하였으면 하는 뜻이 있으니 이에 어찌 別見이 있으리요 嚴刑 放送하라 하였다. 同年 京城罪囚 金鍾輔·李亨秀·南毅鎭이 印信 僞造한 事件을 아울러 完決하였다. 取服 結案한 金鍾輔를 都囚徒의 登對稟處로 因한 刑曹 草記에, 金鍾輔는 印形이 完成되지 못하고, 篆劃이 分明치 아니함은 木片으로서 盜踏한 것 같다 하였다. 傳敎에, 僞造한 律을 어떻게 免할 수 있으리요 마는 印形이 完成되지 못하고 篆劃이 分明치 아니한 이같은 類는 次律로서 施行하는 것이 스스로 常典에 있으니 嚴刑하여 減死 定配하라 하였다. 李亨秀는 判書 심고의 奏達한 바에 依하면 印跡에 조금도 篆刻한 뜻이 없고 木片 또는 瓦礫으로 찍은 것과 恰似하다 하였다. 임금께서, 所謂 文書란 것은 片片이 斷爛한 書簡이요. 所謂 印跡이란 것은 篆字를 成劃하지 못하였다 하니, 受敎의 定式을 이같은 囚案에 合用하되 卿이 물러가서 受敎를 考察하여 곧 酌決하라 하였다. 南毅鎭은 判書 심고의 奏達한 바에 依하면 그 僞造한 印信이 木刻 또는 랍전이 아니고 이는 한 쪼각의 胡朴이었으나 使用한 後는 卽時 碎棄하였으며, 그 出賣한 바는 卽欺人 取物한 것인즉 다른 僞資의 僞帖을 廉價로 京·外에 賣買한 것과 對比하여 볼 때 또한 間隔이 있다 하였다. 임금께서 瓦礫과 밀랍을 莫論하고, 또는 胡朴과 足朴을 莫論하고 琠 字를 成劃하지 못하고, 印信을 方式과 같이 못한 者는 減死하는 科에 付할 것은 일찌기 受敎한 바 있었는지라. 이 罪囚인즉 僞券에 踏印타가 일이 現捉되었으니 어떻게 當施하는 律을 免하랴 犯情이 꼭 같은 두 사람은 首從이 分明치 못하고, 저는 中路에서 奪券할 計劃은 窮困하고 僭濫한 생각에서 나왔음을 明白히 알 수 있으니 哀矜이란 그 字는 正히 이 獄事를 爲하여 準備된 것이로다. 卿의 疑段을 이르킴은 깊이 獄事를 審按하는 體面이 있는 것이니 南毅鎭은 嚴刑 定配함이 可하다 하였다. 同年 京城居住人 李羲暹은 御寶를 僞造하고, 僞帖을 成出하여 鄭景周와 買賣한 것을 刑曺의 完決內에 義羲暹이 이미 死亡된 金昌潤을 援引하여 自脫을 꾀하고저 함으로 嚴刑 取服한다 하였다. 本曹判書 심고의 奏達한 바에 依하여 임금께서, 이미 死亡된 사람에게 추위함은 어찌 圖生하려는 奸謀가 아님을 않겠는가 저의 供辭中 가서 對質한다면 全貌가 스스로 現露될 것이라 하니 이것이 或 말이된다 할지라도 모든 共犯들 中에 首從을 區分하기 어려움은 南毅鎭과 다름이 없고, 이러나 저러나 卿의 말이 나의 뜻과 甚히 合致되니 李羲暹은 毅鎖의 例에 依하여 勘決함이 可하다 하였다. 〔重補〕 紅牌僞踏 今上 4年 京城居住人 朴昌郁이 紅牌를 僞造하여 德이 金殷采에게 潛賣하는데 倡人 方泰京이 居間하였다. 刑曹 奏達에, 昌郁이 僞造한 情節은 方泰京과 金殷采의 招供에서 탄로되었으나 半含 半吐하고, 또 李壽同으로서 潛賣함에 있어 저도 參見은 하였으나 壽同은 이미 致斃되었다하니 嚴刑 輸情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에, 依允하였다. 本曹議啓에, 參議 李獻慶은, 泰京이 昌郁과 같이 가서 한 狹巷에서 買收하였다하니 紅牌가 別處에서 나온 것을 可히 알 수 있다 하나 마침내 眞的으로 指告할 곳이 없음으로 嚴刑 取服한것이라 하였다. 判付內, 저가 이미 紅牌를 潛賣하였은즉 어찌 御寶를 僞造한 일이 없겠는가 僞造의 1款은 이제 추핵할 緊證이 없으니 이같은 獄囚는 傳生한는 것이 진실로 좋은지라 昌郁은 紅牌를 潛賣한 律로서 論하여 곧 決放하라 하였다. 〔重補〕 15年 本曺 草記에 因한 京城罪囚 金晉煥이 紅牌를 僞造하고 關文을 假作하였음을 輸款 啓聞한데 대하여, 判付內에, 삼가 先朝의 受敎를 考覽컨대 御寶를 僞造한 篆劃이 分明치 아니하고, 僞造한 眞贓을 現捉하지 못한 것은 當律을 쓰지 말도록 下敎하온지라. 白紙쪼각을 濕摺하여 어떻게 篆字를 成劃할 道理가 있으리요 마는 紙片도 또한 찾어오지 못하였은즉 卽此 兩件은 受敎의 定式을 違背함이 있고, 僞印에 이르러서는 비록 贓物이 있고, 印跡과 篆劃이 果然 十分 明白하다면 대벽에 措置한다 할지라도 容或 所犯을 更議할 것 없거니와 該 廳의 關辭가 이미 模糊하고, 本曺의 回啓도 또한 개급치 아니하였으니 그 一律로서 重罰하는 길은 可히 遽然히 判下할 수 없으니 朝會時를 기다려 곧 論理 回啓하라 하였다. 刑曺 奏達에, 金晉煥이 紅牌의 篆劃을 僞造하였음은 皺微도 疑心이 없고, 關文의 印跡은 옆으로 비틀어져 模樣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木片으로 만든 眞贓은 元犯을 免하기 어렵다 하였다. 判付內, 僞印한 木片이 비록 있다 할지라도 篆劃이 의결되어 模樣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였은 즉 受敎中 分明치 못한 것은 用律하지 말라는 條件과는 이미 沕合한 것이며, 御寶를 僞造한 종이에 木片으로 찍었든 蜜蠟으로 찍었든 間에 하나의 原本을 捉納하지 못하였은 즉 이는 또 受敎中 眞贓을 捉納하지 못한 條件 果然 친당한지라, 이로서는 完結될 수 없는 것이니 受敎의 定式에 依하여 嚴刑한 後 遠島에 終身限 充軍하라 하였다. 僞造戶長印 肅宗 17年 本曺判書 尹以濟의 奏達한 바에, 龍崗縣에 戶長의 印을 僞造한 罪人이 있는지라, 法典內에, 印信을 僞造한 者는 斬刑에 處한다 하였으나 各衙門과 戶長의 印信을 區分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罪人은 衙門의 正印을 僞造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마땅히 區別하는 길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元來 正印이 아니면 一罪는 過重하니 1等을 減하여 絶島에 奴子로 만들고 赦典을 分揀하지 말도록 永永定式하라 하였다. 〔重補〕 僞造烙印 今上 14年 京城居住人 朴昌任은 烙印을 僞造한 事件으로 刑曺에서 完結하였다. 朴昌任은 烙印을 僞造한 罪를 減死 宥還케 한다면 이는 멀지 아니하여 또다시 前習을 踏襲할 터이니 이같이 再犯할 수 있는 이러한 類는 마땅히 호종으로 論하여 僞造한 節次를 承款 結案하여야 한다 하였다. 判付內 供述한 바가 너무나 分明치 못하니 常情으로서 미루어 본다면 어찌 1杖도 내리지 아니하고 一律로서 自服할 理 있겠는가. 事理를 揆察함에 자못 그런 것도 아니로다. 烙印은 印信과 다르고 烙印의 僞造를 印信 僞造와 同律로 한다 함은 더욱 妥當할지 모르겠도다. 이 公事는 勿施하고, 烙印 2字가 律文에 現在하는 與否와 前者 烙印 僞造의 일로서 用律한 與否를 該 判堂處에 問啓하여 萬一 差誤가 있다면 擬律 不審한 罪를 어떻게 免할 수 있겠는가. 該 房은 다 알고 擧行하라 하였다. 符 牌 馬牌 破傷 肅宗 8年 靑坡驛吏 李命이 南山驛에 到着하여 馬牌로서 主人 金永祿을 毆打하고 馬牌를 破碎하였다. 兵曺 草記에 因한 本曺啓目에, 律에 비추어 杖 90에 從 2年半으로 한다 하였다. 임금께서, 依允하였다. 偸出馬牌 〔重補〕 今上 9年 張運昌은 朴廷臣과 더불어 符同하여 빈 把上 한 장에 刀擦한 干支를 改塡하여 尙瑞院에 付送하여 馬牌를 받아내어 外邑에 橫行하면서 宮監이라 稱하고 小民을 侵虐하였다. 傳敎에, 馬牌를 偸佩하고 把上을 僞造하였음은 卽 前日에도 듣지못한 事件이로다. 이들 간귀한 무리는 嚴한 法으로 重繩하여 後日을 懲戒하라 하였다. 刑曺 啓目에, 張運昌과 朴廷臣이 馬牌를 圖出하고, 把上을 僞着한 事實을 3次로 故意 犯行하였음을 저 이미 自服하였으니, 이는 一律에 屬한지라 運昌과 廷臣等은 依例 取服 結案한 後 稟處한다 하였다. 判付에, 依允하였다. 己酉年 本曺 議啓에 因한 傳敎에 張運昌은 把上을 僞造하고, 馬牌를 偸竊하여 해마다 作奸한 것이 문득 技倆을 이루었으니 저 何敢히 死律을 免하랴. 그러나 朴廷臣으로 더불어서는 오히려 隨從이 別이 있고, 廷臣은 庾斃되었은즉 저의 究竟을 근지할 必要가 없으니 減死 酌決하라 하였다. 尹起莘이 馬牌를 偸出하였다. 傳敎에, 決코 故意로 犯行한 것이 아니고 無知妄作한 所致에 不過하니, 先朝에 이러한 罪犯은 또한 從輕하는 制度가 있었으니, 減死 定配하라 하였다. 書契裂破 肅宗 45年 本曺 啓目에, 安老味는 醉酒한 사람으로서 莫重한 書契를 裂破하고, 使令을 亂打하고, 王子君을 후욕한 情狀은, 이미 遲晩한지라 이로서 照律함이 如何하오리까 하였다. 判付內, 이 사람의 所犯은 書 를 裂破한 것이 較重하므로 비록 이 律을 引用한다 할지라도 一律로 處斷함은 不可하니 次律로서 減死하여 邊遠에 充軍하라 하였다. 兵符偸竊 英宗 40年 咸鏡監司 宋文載의 啓本에, 鏡城 金克燁은 其妻 采鳳이 僉使 張宅夏의 방비됨으로써 恒常 快快之心을 품고, 采鳳에게 暗囑하여 張宅夏가 차고 있는 兵符를 偸出 하여 燒火하였음으로, 宅夏가 木片으로서 兵符를 假作하였다가. 臺啓로 因하여 梟示되고, 克燁과 采鳳은 아직까지 같은 獄에서 1杖도 받지 않고 있음을 사람들이 全部 憤愾하고 同年 3覆時에 克燁과 采鳳을 아울러 依律할 것을 判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