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법제의 과제와 발전방향
- 구분특집(저자 : 홍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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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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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063
21세기 한국법제의 과제와 발전방향 -공법분야-
洪 準 亨
I. 序 論
II. 建國 以後 韓國法制의 發展
1. 건국초기 법제기반의 구축
2. 군사정권하에서 법제의 변천
3. 민주화과정에서의 법제발전
III. 韓國法制 50年의 敎訓
IV. 21世紀 韓國法制의 課題
1. 행정절차법의 개혁
2. 정보공개법의 개혁
3. 지속적 행정개혁·규제개혁의 추진을 위한 법제화
4. 행정통제 및 행정구제제도의 개혁
5. 행정조직법의 개편
6. 지방자치법제의 개혁
V. 結 論
Ⅰ. 序 論
한국의 법제는 건국 이후 50여년을 통하여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급속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다. 해방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법제의 기반은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잔재와 우리 나라의 법전통과는 동떨어진 미군정법제의 이질적인 결합물, 그것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법제는 가히 황무지와 같은 토양에서 출범하였고, 이후 근 40년에 가까운 민주주의의 실패와 그에 따른 정치·행정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파행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법제는 험난한 역정을 거쳐 이제 상전벽해와도 같은 괄목할 만한 변화·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동안 무엇이 어떻게 바뀐 것인가. 그간의 歷旅를 통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는가. 이제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한국의 법제가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하여야 하는지를 묻고 답할 시간이다.
이 글은 건국 이후 50여년간 공법분야에서 한국법제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고 이를 바탕으로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건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법제의 발전과정을 개관하고, 그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한 후, 21세기 한국법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Ⅱ. 建國 以後 韓國法制의 發展
건국 이후 50여년 동안 공법분야에서 한국의 법제가 걸어온 길은 거듭된 민주주의의 실패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점철된 한국의 사회사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파란만장한 도정이었다. 이제 그러한 발전과정을 주요 시기별로 간략히 개관해 보기로 한다.(주석1)
1. 건국초기 법제기반의 구축
해방 이후 행정에 관한 법령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상태에 있었다. 특히 건국헌법 제100조(부칙)에 의하여 그것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구한말법령·일정시법령(日政時法令) 및 미군정법령·과정법령(過政法令) 등 잡다한 구법령들이 대한민국정부에 의하여 제정된 법령과 더불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행정에 대한 법적 규율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사실상 곤란했다.(주석2)
이처럼 건국초기 한국법제는 일제의 잔재를 불식하지 못하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건국헌법은 그 시행초기부터 정치와 행정을 제대로 규율하지 못했고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무시 내지 농락당하는 등 중대한 시련과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힘'의 불법통치에 의하여 헌법의 규범적 효력이 완전히 무시되고 헌법이 하나의 명목적·장식적 구실밖에 하지 못하는 제1공화국의 헌정하에서(주석3) 법현실과 법규범간의 괴리가 일상화되었다. 이후 拔萃改憲(1952)과 四捨五入改憲(1954) 등 불법적인 개헌을 거듭한 자유당독재정부가 4.19 학생의거를 통해 붕괴된 것은 그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이처럼 일국의 최고규범인 헌법이 규범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도 공법의 근간이 되는 법령들이 만들어졌다. 우선 헌법이 공포된 1948년 7월 17일 정부조직법, 국회의 구성 및 운영을 규정한 국회법, 법원의 조직을 규정한 법원조직법이 제정되었고, 1949년 7월에는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어 우리 나라 행정조직의 법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이어 1951년에는 건국헌법 제81조 제1항에 의거하여 行政訴訟法이 제정되었다. 행정소송법의 제정은 법치행정의 원리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인 행정재판제도를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당시 일본의 行政事件訴訟特例法(1948)을 본받아 본문 14개조의 극히 간략한 내용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自足的 法이라기 보다는 민사소송법에 대한 특례를 규정한 특별규정 또는 특례법으로서의 성격을 넘지 못했고, 내용적으로나 실제 적용상으로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주석4) 이후 제2공화국 헌법은 基本權保障을 확대·강화하고, 권력균형의 원리에 입각한 內閣責任制를 도입했으며, 憲法裁判所를 창설하는 등 법치국가적 요소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지만, 민주화와 행정부의 상대적 권한약화에 따른 정치사회적 이완과 집권당인 민주당의 내분, 반민주행위자, 자유당정권하에서의 부정축재자 등의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개헌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고, 일제이래 지속된 법의 도구주의적 사용으로 인한 법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게 남아있던 상황에서 이렇다 할 법제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2. 군사정권하에서 법제의 변천
한국의 법제가 박정희 소장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막을 연 군사정권하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의 하나였다.
2.1. 군사정권과 법제의 변화
⑴ 제3공화국
먼저, 박정희정권의 제1기인 제3공화국에 있어 법제의 성격은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발전주의(경제성장제일주의)에 의해 규정되었다.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의문시된 정치적 정당성을 보완하고 정치적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주도에 의한 근대화-경제성장정책을 추진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박정희정권이 동원한 수단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에서는 관료조직을 제도화함으로써 경제성장드라이브를 실행할 행정기구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통제를 강화시켰다. 정부의 권력구조, 정당제도 등 모든 정치-행정체제가 국정능률의 극대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운영되었으며, 그 결과 기술관료들에 의한 관료적 통치체제가 고착되기 시작했다. 관료조직의 제도화를 이끈 이념중의 하나는 행정의 효율성이었다.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요소로서 행정의 능률과 목적달성을 저해하는 모든 행태는, 그것이 설령 헌법상의 기본권이나 법적 근거에 의거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배척되었고 법적 제재를 받았다. 법이 정치와 행정에 의해 압도되었다. 바로 그 같은 맥락에서 이 시기 법제의 특징을 설명해주는 결정적인 요인이 배태되었다. 그것은 일제로부터 전수받은 법의 도구화전략이었다.
법의 도구화는 첫째, 입법의 정부주도에 따른 국회의 입법기능 약화에 기인한다. 국회의 입법기능은 우선 비상입법기구에 의한 입법, 초헌법적 비상입법의 남발을 통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 점은 박정희정권 출범당시부터 비상입법기구에 의해 행해진 입법권의 전횡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1961년 5.16 군부쿠데타 이후 성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61.5. 19-63.12.26)는 입법·행정권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2년반의 기간 동안 무려 1,008건의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 수치는 1963년말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 법률의 62%에 달하고, 1987년말을 기준으로 할 때도 25%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여기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61년 이전까지 지지부진했던(주석5) 구법령정리사업을 추진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른바 혁명과업의 일환으로 '舊法令整理에관한特別措置法'(1961.7.15)을 제정하여 정리사업을 추진하여 건국헌법 이전의 법령은 1962년말까지 정리하고, 그때까지 정리되지 않은 구법령은 폐지되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군사정권이 구법령정리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① 해방후 16년 동안 일본법령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의 국민정서상의 문제, ② 일본어해득의 미숙으로 일본법령의 적용상 문제점의 발생, ③ 삼권통합으로 능률적 사업추진이 가능하게 된 점, ④ 이미 민·형법, 민·형사소송법 등 기본법령이 정비되어 신속한 제정이 가능하였다는 점, ⑤ 민간정부의 비능률성을 과시할 군사정권의 필요성 등이었다. 그 결과 불과 165일 동안 총 389건의 신법령이 제정되였고, 618건의 과거법령이 폐지되었다. 이로써 법령면에서 일제와의 단절이 이루어졌으나, 그것이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아울러 제3공화국 말기부터 비상입법이 남발되기 시작하였다. 1971년의「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도 그러한 비상입법의 예였다. 박정희정권은 국회에서의 비생산적 대결이 남북간의 긴장완화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같은 해 12월 27일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다.(주석6)
제3공화국에 있어 국회의 입법기능은 강력한 행정부의 영향력 아래 입법의 정부주도경향과 위임입법의 확대현상이 진행됨에 따라 약화일로를 걸었다. 국회의 입법기능은 특히 입법의 정부주도경향이 강화된 제3공화국 후반기(1967-1972)에 심각하게 퇴조하기 시작했고,(주석7) 위임입법의 확대에 따라 실질적으로 형해화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입법을 정부가 주도함으로써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내용의 입법이라도 관철시킬 수 있다는 사고가 정책과정을 지배했고 법은 정책과 행정의 수단이라는 종속적 의미에서 행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둘째, 법의 도구화경향은 근대화-경제성장정책의 추진에 따라 양산된 법령의 성격과 내용을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양산된 법령들은 주로 경제성장과 사회통제를 위한 것들이었다.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위한 국가적·민간적 자원의 동원과 이용을 가능케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제관계법령들은 경제의 합리적 조정과 운용보다는 경제논리만으로 관철하기 곤란한 사항을 법률의 틀로써 정당화하거나,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의 특권적 개입을 뒷받침한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정부의 경제개입이 확대될수록 법률은 국가정책과 행정을 지원하고 그 근거를 제공하는 도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사회통제를 위한 법령도 양산되었다. 반공법,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등 국가안보를 이유로 한 사상통제와 정치적 억압을 목적으로 한 법령이 대거 산출되었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노동관계법,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등 각종 법령이 개악되었다. 그 결과는 고문, 불법구속 등을 비롯한 인권상황의 악화로 귀결되었다.
⑵ 제4공화국
박정희정권의 제2기에 해당하는 제4공화국에 있어 법제 역시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었다. 제3공화국의 경우에 비해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발전주의와 함께 국가안보가 국정목표의 前面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의 제3공화국에서도 반공주의로 대표되는 안보이데올로기가 표방되기는 했으나, 이 시기처럼 최우선의 국가목표로 고양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제4공화국을 지배한 발전주의와 안보주의는 이후 6월 시민항쟁 등 국민적 압력에 못이겨 직접선거를 통한 대통령선출이 이루어진 1987년까지 한국 행정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고,(주석8) 법제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이 시기의 국정운영방식은 공화정을 가장한 전제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었다. 헌법개정논의 자체를 금지한 1975년 5월의 긴급조치 제9호는 바로 그 점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법의 도구화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1972년 국회해산에 따라 국회의 기능을 대신한 비상국무회의는 총 280건의 법률을 제정했고, 이후 집권당의 국회지배와 정부의 입법주도에 따라 국회는 通法府로 전락했고, 입법내용에 있어서도 특별법령, 비상조치 등이 남발되고 위임입법이 더욱 확대됨으로써 법의 권위와 정당성이 전반적으로 실추되고, 법률보다는 명령과 규칙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일상화되었다. 정부의 경제개입과 사회통제를 위한 법령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확대되었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입법조치가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그대로 관철되었다. 정치·행정의 필요에 따라 각종 법령이 용이하게 제·개정됨으로써 법에 대한 신뢰도가 저하되었고, 형사처벌 위주의 법집행 역시 국민의 불신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⑶ 제5공화국
제5공화국의 행정법제 역시 박정희정권의 제4공화국과 다름없이 발전주의와 안보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었다. 박정희정권의 몰락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분쇄하고 집권한 신군부정권은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의 기반을 보완하고 정권의 안보를 위하여 민주복지국가를 표방한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법의 도구화경향과 법에 대한 행정의 우위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권출범 당시 설치되었던 '국가보위입법회의' (80.10.28-81.4.20)라는 비상입법기구의 활동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과거 제4공화국 때 발동된 긴급조치의 내용을 거의 대부분 법률로 제정하였고, 인위적 정당조직 및 정치개편, 정치인의 참정권제한을 통해 사실상 일당국회를 만들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등 국가보위와 사회정화, 정의사회구현, 개혁 등을 표방하면서 각종 전횡을 일삼았고, 총 189건의 법률을 제정하였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통과된 법률들은 '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선거법, 정당법 등 정계개편 및 신정권창출을 위한 입법,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개정', '언론기본법' 등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입법, 국가보안법·사회보호법 등 사회통제와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억압을 강화시키기 위한 입법,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입법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전두환정권은 이러한 입법에 대하여, 헌법부칙 등에 비상입법기구가 제정한 법령의 효력은 지속되며 헌법위반 등의 이유로 제소될 수 없다는 명문의 규정을 두어 그 정당성과 위헌성에 대한 논란을 방지했는데 이는 국보위에 의해 제정된 이들 법률들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이처럼 출범 당시부터 전두환정권은 입법을 집권 및 통치기반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하였다.
법이 행정을 효과적으로 규율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은 제4공화국의 경우와 다름없이 계속되었다. 최고규범으로서 헌법의 효력을 실현시키기 위한 위헌법률심사제도는 여전히 휴면상태에 있었고, 헌법의 권리장전은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5공화국은 그 동안 경제개발추진과정에서 비대화된 행정조직을 1980년대의 변화된 환경에 맞게 개편한다는 명분아래 '작은 정부'의 논리를 앞세워 1981년 10월 15일 대규모의 행정개혁을 단행했다.(주석9) 작은 정부의 논리는 이후 한국의 행정개혁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이것은 반복지국가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신우익론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구미 선진국들의 감축관리운동에서 유래된 것이었으나, 당시 '신군부' 세력은 이에 대한 명확한 개념 설정 없이 정치적 수사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당시의 정부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여 정부기능의 축소와 시장기능의 창달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복지국가'의 구현이니 '사회정의의 실현'이니 하는 적극국가의 이념을 제창하는 상호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주석10) 제5공화국에 있어 행정개혁은 헌법 등 법적 요구보다는 행정적 능률성과 합목적성의 고려를 앞세운 행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부조직개편은 마치 법과는 무관한,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책선택의 문제로서 다루어졌다. 행정개혁은 헌법적 가치에 적합한 공적 임무의 실현을 위한 정부의 조직형태를 구축하는 과제로서 그 자체가 가치충전적인(werterfu"llt)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주석11) 주로 법과는 무관한 정책적 재량의 문제로 처리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중요한 행정법제의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1984년에 행정소송법과 행정심판법이 각각 개·제정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중 행정소송법은 1951년 제정된 이후 30여년간 두 차례의 부분개정을 거친 것 외에는 기본골격과 내용을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1980년 이래 추진된 대폭적인 개정작업에 따라 1984년 11월 28일에 가서야 비로소 전면개정되어 1985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그밖에 생활보호법, 의료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사회복지분야의 행정법제가 개선되었다. 이는 당시 팽배해 있었던 대중들의 사회보장에 대한 요구를 고려한 결과라고 볼 수 있으나, 결국 대부분 선언적 의미만을 지닌 것이어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2.2. 군사정권하에서 법제발전의 반면: 법치주의의 훼손
전체적으로 볼 때 군사정권하에서의 법제발전은 개발독재에 의한 법치주의의 훼손이라는 배경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행정부우위의 국정운용방식이 고착되고 법의 도구화경향이 진전됨에 따라 법치주의의 요구는 '법률에 의한 행정'이 아니라 '명령·통첩·행정규칙에 의한 행정'에 의해 근본적으로 형해화되었다. 군사정권이 구축한 관료적 권위주의의 지배구조하에서 법제는 정치와 행정의 효과적 수단으로서 동원되었던 반면, 권력의 자기제한과 국민의 자유를 강조하는 법치주의의 요구는 범주적으로 무시되었다.
법치주의의 기본적 요구인 「사법부의 독립」이 군사정권에서 심각한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건국초기에는 김병로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사법부의 독립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지만, 이후 제3공화국까지 사법권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는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사법부의 독립은 많은 도전과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주석12) 특히 사법권의 독립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때가 제4공화국이었다. 사법부 역시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불법조치에 의한 정치적 억압을 충실히 실행하는데 '정치권력의 시녀'로 봉사했던 검찰과 함께 소극적이나마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4공화국말까지 휴면상태에 빠져있었던 위헌법률심사제도였다. 법률이나 법률하위의 명령, 행정규칙, 지시 등에 의하여 헌법의 규범적 효력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처럼 적어도 헌법재판소가 활동을 개시할 수 있었던 1988년 9월 19일 이전까지 자유민주주적 법질서의 근간인 법치주의는 사실상 공허화되고 있었다.
이처럼 군사정권하에서 법치주의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훼손함으로써 법의 도구주의적 사용을 통한 법제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나, 그 결과는 법질서 전반의 정당성 위기로 이어졌다. 즉, 행정이 법의 제약을 벗어나 사실상 법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법이 도구화되고 처벌·통제 중심의 법사용이 일상화된 결과 법에 대한 불신이 확산·고착되었고, 행정이 법적 수단을 사용하거나 적법한 범위내에서 그것을 행사한다 할지라도 국민의 신뢰와 순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행정과 법이 공동실패를 겪는 정당성의 위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제4공화국말기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행정과 법질서에 대한 의도적·집단적 반발, 그리고 이후 전두환정권에 이르러 훨씬 악화된 형태로 증폭되어 나타났다. 1979년의 부마항쟁,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이나 1987년의 6.10 시민항쟁 등이 그러한 정당성위기의 악순환 메카니즘을 실증해 주었다. 제3공화국에서 제4공화국, 그리고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누적되어 온 반법치적 행정의 관행은 결국 행정의 법에 대한 우위, 법의 도구화, 처벌·통제 중심의 법사용으로 인한 법질서 전반에 대한 불신을 확산·고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민주화과정에서의 법제발전
3.1. 80년대 과도기의 법제변화
이후 한국의 법제는 1980년대라는 과도기를 지나 민주화과정이 본궤도에 오른 1990년대초 본격적인 성숙기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6월시민항쟁에 따라 출범하게 된 노태우정권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민통제시대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도기였고 따라서 그 시기에 이루어진 법제발전 역시 과도기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한국법제사에 있어 1980년대가 갖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80년대 전체를 들어 양차의 개헌과 행정쟁송법의 전면적 정비, 행정절차법의 입법예고 및 지방자치법의 개정 등이 이루어져 행정법에 있어서도 발전적 전환기를 맞이한 시대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나,(주석13) 1980년대는 어디까지나, 적어도 그 중반까지는, 70년대의 연장으로서 파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가령 1980년의 개헌은 환경권규정의 신설, 행정심판의 준사법절차화에 대한 헌법적 후원 등 주목할 만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에 있어서는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1975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행정절차법의 제도화를 위한 시도는 80년대에 가서도 관철될 수 없었고, 또 전두환정권에 의해 護憲措置의 代償으로 준비되었던 행정절차법안 역시 1987년 입법예고를 거치고도 무산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한계성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행정쟁송제도의 개혁 또한 1984년에 가서야 행정심판법의 제정과 행정소송법의 전면개정 등 불충분한 개혁으로 귀결되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공법분야 한국의 법제는 노태우정권 들어 법치주의의 재발견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적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물론 1987년 6월의 시민항쟁이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절대권력으로 군림해왔던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요구를 통해 붕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군사정권의 변함없는 비토그룹이었던 학생운동세력과 노동자세력의 성장, 산업화의 진전에 따른 중산층의 성장과 자각, 그리고 사회 각 부문의 전문화는 입헌주의적 법치주의를 위한 사회적 토대를 구축하는 여건이 되었다. 법치주의를 향한 또 하나의 결정적 전기는 1988년 9월 19일부터 헌법재판소가 설치되어 활동에 들어감으로써 주어졌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규범적 효력을 확인·회복시킴으로써 과거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적 지배체제의 정당화수단으로 봉사했던 헌법을 권력분립을 토대로 국민의 기본권보장을 추구하는 법치주의의 보루로 탈바꿈시켰고, 헌법재판소의 규범통제는 이후 대법원을 정점으로 한 사법부는 물론이고 수시로 행정의 효율성을 내세워 법의 굴레를 벗어나기 일쑤였던 행정의 반법치적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1988년 활동을 개시한 헌법재판소에 쇄도한 수많은 사건들은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적 갈망을 여실히 대변해 주었다.
이 시기의 공법분야에서의 법제발전으로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환경법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1977년 종래의 공해방지법(1963)을 대체한 "환경보전법"이 제정되고 1980년의 헌법에 환경권이 기본권으로 신설된 후, 1986년 환경보전법을 위시한 일련의 법개정이 이루어졌으나, 1990년 환경청이 환경처로 승격되고, 같은 해 7월 임시국회에서 이른바 '환경6법'이라 일컬어진 環境政策基本法·大氣環境保全法·水質環境保全法·騷音振動規制法·有害化學物質管理法·環境汚染被害紛爭調整法이 제정됨으로써 환경법이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정권하에서의 법제의 발전은 진정한 의미의 법치국가의 그것과는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가령 노태우대통령은 국력의 소모와 사회경제에 부정적 파급효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만으로 지방자치법의 명문의 규정을 무시하고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독단적으로 연기하고(주석14) 국회에서의 날치기입법을 거듭하는 등 법에 대한 행정의 도구주의적·조작적 태도를 여전히 견지함으로써 법치주의의 규범적 요구를 정치행정적 편의에 따라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법이 행정을 효과적으로 규율하지 못하여 대중의 법적 불신을 초래하거나 법제상 적지 않은 문제점이 드러났음에에도 불구하고 현대 법치주의의 기본적 보루인 헌법재판제도가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법치주의를 향한 일종의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다.
3.2. 문민통제 시대의 법제발전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문민통제(civilian control)시대는 한국의 법제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노태우정권에 이어 출범한 김영삼문민정부의 개혁정치에 따른 법제의 발전은 그 새로운 지형이 되었다. 문민정부에 있어 법제는 그 이전 정권에서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진일보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규정하자면, 법치주의의 恢復·實踐이 본격화되고 그 過程에서 施行錯誤를 겪는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전 노태우정권하에서 1987년 헌법에 의하여 定礎된 법치주의의 제도적 기반을 바탕으로 행정법제의 틀이 새롭게 짜여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방향을 향한 序幕을 연 것은 국제그룹해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었다. 이 사건에서 청구인은 국제그룹해체가 공권력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고 그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면서 1989년 2월 27일 그 공권력의 행사의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고, 헌법재판소는 1993년 7월 29일(89헌마31:헌재공보 93, 265) 국제그룹해체를 위한 공권력행사를 위헌으로 판시했다.(주석15)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의 위헌판결이 있은 지 22년만에 나온 헌법재판소의 이 사건결정은 그것이 문민정부의 출범직후에 나온 것이라는 時宜性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동안 개발독재와 권위주의적 법질서에 의해 지지되었던 경제간섭주의 즉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헌법의 최고성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확인하는 적지 않은 수의 결정례들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이처럼 법의 지배를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국가권력을 구속하는 헌법원칙으로 확립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대법원 역시 생수시판금지위헌판결(주석16) 등을 통해 헌법 및 기본권의 보장자로서 자기위상을 확보하려는 사법적극주의적 태도를 천명했다. 이로써 현대 법치주의의 근본요구인 헌법의 지배를 향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문민정부에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공법분야에서의 법제발전은 행정과정에 대한 법적 규율을 강화·충실화하기 위한 일련의 입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1996년말 행정절차법과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정보공개법")이 제정되었고, 1997년 8월에는 행정규제기본법,『민원사무처리에관한법률』("민원사무법")과 행정심판법이 각각 제·개정되었다. 이후『행정절차법의시행에따른공인회계사법등의정비에관한법률안』이 제정되어 행정절차법과 함께 시행되었다. 1998년 3월 1일에는 1994년 7월 27일 개정된 법원조직법 및 행정소송법 등이 시행되어 행정심판이 임의절차화하고(행정심판전치주의의 원칙적 폐지) 행정법원이 신설되는 등의 법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김영삼정권말기 불과 1-2년만에 행정법의 발전과정에서 중추적 의미를 가지는 핵심적 법률들이 대거 제정 또는 개정되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행정절차법과 정보공개법의 제정이다. 전체로서 행정정책이 수립·집행되는 과정을 거시적 행정과정이라 한다면 행정절차는 미시적 행정과정이라 할 수 있고,(주석17) 정보의 공개 및 보호는 행정과정에 대한 참여를 가능케 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행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개인의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 된다. 이들은 결국 행정과정에 대한 참가와 공동생산을 水路化함으로써 행정의 타당성과 공정성을 증진시키고 법치행정 및 민주행정의 원리를 실현하는 데 봉사한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행정법제의 변화는 바로 그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법제개혁의 산물이자 가장 핵심적인 성과였다.
물론 이들 법률들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행정절차법은 총 54개의 조항에도 불구하고 극히 소졸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법은 전체적으로 보아 일본행정수속법 보다는 상세한 내용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총칙의 일부와 행정상 입법예고, 행정예고 등을 제외하면, 오히려 일본법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소극적·수세적인 규율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행정절차에 대한 참여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법은 교묘하게 곳곳에서 국민들의 적극적·능동적 참여권을 배제했다. 따라서 행정절차의 권리구제적 기능도 크게 제약되는 결과가 되고 있다.(주석18)
한편 그 동안 역대정권의 주요 국정현안으로 추진되어 온 규제완화 또는 개혁작업은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와닿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규제의 총량을 줄이는 데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주석19)을 받아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규제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법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행정규제기본법이다. 이 법률은 종래 「행정규제및민원사무기본법」에 규정되어 있던 행정규제에 관한 조항들을 확대재생산하여 규제개혁의 추진을 위한 전담기구로서 규제개혁기구의 설치, 規制影響分析(Regulatory Impact Analysis:RIA), 規制日沒制(sunset regulation)의 도입과 規制整備綜合計劃을 통한 체계적인 規制整備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규제개혁의 새로운 틀을 구축하였다. 이 법은 그동안 규제개혁방안으로 제시되었던 갖가지 정책수단들을 최대한 수용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진취적인 입법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다.
또한, 민원사무법 역시 民願事務의 接受 및 優先處理義務, 지체없는 민원처리를 요구할 수 있는 청구권의 인정, 民願1回訪問處理制 및 民願事務處理基準表 告示制度의 강화, 市·郡·區 또는 기타 지역단위별 行政相談委員制의 도입, 民願事務의 簡素化 등을 통하여 기존의 민원사무처리절차를 대폭 개선하였다. 이것은 특히 일선행정기관에서의 민원사무처리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영삼정부는 환란이라 지칭되는 전대미문의 국가위기를 가져왔을지라도 행정법제에 관한 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법분야 법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법치주의의 開花期로 볼 수 없는 것은 법의 도구화, 법의 조작적 사용과 행정편의주의로 특징지워지는 종래의 고질적인 반법치적 관행이 근본적으로 불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례로 이전 시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민정부의 임기 동안 국회는 사실상 정부의 하청입법 또는 통법부로서의 역할 이상을 수행할 수 없었고 이를테면 '큰 법제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모멸적인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국회는 역대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에 우위를 가졌던 김영삼 '문민정부'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다. 또한 김영삼정부하에서도 위임입법이 크게 확대되어 권력분립에 입각한 법치주의를 형식화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김영삼정부 들어 공법분야의 법제가 이전 시기에 비해 법치주의를 향한 중대한 진전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 역시 고질화된 법의 도구화경향과 행정에 대한 법적 규율의 실효성저하 등으로 인하여 법치주의가 정착되거나 개화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다소 진전된 과도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Ⅲ. 韓國法制 50年의 敎訓
이제까지 건국 이후 50여년간 공법분야 법제의 발전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면 건국 이후 50여년 공법분야 법제의 발전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외형적인 법제의 발전이 반드시 법치주의의 실현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며 법치주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법제발전은 결국 정치와 행정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상화된 법의 도구화와 함께 처벌·통제 중심의 법사용의 결과 법에 대한 불신이 확산·고착됨으로써 행정이 법적 수단을 사용하거나 적법한 범위내에서 법적 조치를 취하더라도 국민의 신뢰와 순응을 획득하지 못해 결국 행정과 법이 함께 실패하는 정당성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은 1960년대 이래 30여년을 끌어온 군사정권하에서의 경험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반면 법치주의가 새로운 천년의 지구표준으로 대두되고 있는 이상, 한국의 법제 역시 법치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법치주의는 때로는 투자의 조건으로, 때로는 통상압력의 요인으로, 때로는 지구촌에서의 성년요건으로, 한국의 신뢰성을 판가름해주는 척도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관료적 권위주의의 지령으로 제어되지 않는 계층간, 지역간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 불시에 찾아올 통일 이후의 상황에서 남북간의 내적 통합을 위한 질서인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법제가 지구표준으로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第一義的 目標로 삼아야 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공법분야에 있어 한국의 법제는 그 내용면에서 볼 때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할 정도로 풍성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 목록만 가지고 본다면 어느 선진국 못지 않은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규범적 실효성이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은 반면 사회적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낙후된 부분이 상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법제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천년을 위한 법제의 기반을 구축하려면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법규범과 현실간의 괴리를 없애고, 그동안 변화된 환경하에서 낙후된 법제를 시대상황에 맞게 개선·보완하기 위한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특히 시급한 개선·보완이 요구되는 분야들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셋째, 건국 이래 공법분야 한국의 법제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정치와 행정의 처방을 반영·집행하는 소극적·수동적 작용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제는 종래와는 판이한 환경속에서 새로운 존재증명을 요구받고 있다. 그것은 정보화와 세계화에 따른 지식기반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위한 협주의 규범으로서 새로운 법적 기준을 정립해 나갈 수 있는 학습능력을 갖춘 지능형·개방형 법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미래지향적인 요구이다. 법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 법제과정의 개방화, 쌍방향·상호교환적 의사소통방식을 통한 참여의 확대, 학습 및 예측능력을 갖춘 지능형 법제시스템의 구축 등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Ⅳ. 21世紀 韓國法制의 課題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반 세기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 행정법제가 드러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바로 정당성의 위기와 실체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한국의 행정법제에 제약을 가했던 역사적 요인들, 즉 근대 이전의 행정적·법적 전통과 일제식민지행정법제의 체험, 그리고 해방 이후의 서구행정과 법제도의 이입과 왜곡 등과 같은 요인들에 역사적 배경을 두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은 규범과 현실의 괴리로부터 배양된 행정과 법에 대한 고질적인 불신현상과 법의 도구적, 선별적, 정치적 사용에 따라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문턱에 선 전환기의 한국사회에 부과된 행정법제의 과제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정당성과 신뢰를 회복하는데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한국 법제가 추구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도 법제를 지배나 관리의 수단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생활규범으로 재정립함으로써 이를 소수의 지배자의 수중에서 국민의 손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즉 입법과 행정, 사법과정에 대한 '참여의 확대'를 가능케 하는 법적 보장을 실현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법제의 개혁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공법분야 법제개혁의 주요과제들을 발제형식으로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행정절차법의 개혁
김영삼정부의 임기말에 부랴부랴 제정된 행정절차법은 이제 행정절차의 법제도화를 향한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 안에서 행정이 직면해야 하는 법문화적 지형(legal-cultural terrain)도 판연히 바뀌고 있다. 과연 이번에 제정된 행정절차법만 가지고 험난한 21세기의 도전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지 지속적이고 진지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실천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행정절차법을 형성해 가려는 적극적·능동적 의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행정절차법의 제도적 미비점과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예의 주시하고 분석함으로써 지속적인 법개정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구속적 행정계획의 확정에는 무수히 많은 대립되는 이해관계가 종합적으로 저울질되어야 하고, 행정청과 국민간의 중요한 법률관계가 종합적으로 규율되고 형성되어야 할 것이 요구되므로 하루빨리 합리적인 계획행정절차를 도입하기 위한 입법적 준비작업에 나서야 하며,(주석20) 공법상 계약에 대한 절차적 규율 역시 신설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행정절차법을 개정함에 있어서는 종래처럼 정부주도적 방식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국회의 주도적 역할과 시민사회의 적극적·능동적 참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입법추진과정을 개방화·민주화하여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시민단체 및 시민대표, 각정당, 학계와 실무계를 망라하여 행정절차법개정추진위원회(가칭)를 구성하여 체계적·지속적으로 개정준비작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2. 정보공개법의 개혁
정보공개법 역시 그 제정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시행과정에서의 경험을 살려 지속적으로 개선·정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정보공개법은 정보의 생산, 유통, 이용 등 정보과정 전반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21세기의 생존을 위한 법제도적 기반이므로, 그 내용을 국민의 알 권리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고 정보공개를 통한 국정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지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대폭 보완하여야 한다.
3. 지속적 행정개혁·규제개혁의 추진을 위한 법제화
행정민주화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행정개혁과 규제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법제화가 필요가 있다. 규제개혁에 관한 한 행정규제기본법이 제정·시행되고 있으나, 앞으로 그 시행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면밀히 파악하여 법제도 개선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시민사회에 법제도 전반에 관한 심사(Review), 감시(Monitor)를 위한 공개포럼(open forum)을 정규적으로 제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4. 행정통제 및 행정구제제도의 개혁
우선 행정통제를 위한 법적 수단을 정비·개선하여야 한다. 감사원의 기능을 회계검사 및 직무감찰기능에 국한시키지 말고 총괄적인 부정방지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독립적인 사정기관·부정방지기관으로 위상을 격상시키고 권한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감사원법을 개정하고, 공직자윤리법 역시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실사기능을 강화하고 재산등록·공개의 범위를 확대하며 그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폭 손질하여야 한다. 내부비리고발자보호법을 시급히 제정·시행하여야 한다.
또한 위법·부당한 행정조치에 대한 권리구제를 위한 행정심판법 및 행정소송법을 전향적으로 개정하여야 한다. 특히 의무이행소송, 가처분제도 등 행정의 부작위·태만을 시정할 수 있는 적극적인 쟁송수단이 소송법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하며, 행정청에 대한 원고의 자료제출요구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또한 1998년 3월 1일 서울지역에 신설된 행정법원은 이를 사건발생의 추이를 고려하여 다른 지역, 적어도 고등법원소재지에까지 확대설치해 나갈 필요가 있다. 끝으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기능과 독립성을 강화하여 국민옴부즈만제도로 발전시키는 한편 지방자치수준에서 옴부즈만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5. 행정조직법의 개편
작은 정부, 효율적인 정부를 위하여 장기적 차원에서 정부조직개편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되 국회와 정부합동으로 행정조직차원에서 부처할거주의와 부처이기주의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6. 지방자치법제의 개혁
21세기의 도전을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한 법제도적 기반으로서 지방자치법제를 지속적으로 정비·개혁해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지방자치단체의 사무의 범위와 한계를 분명히 하되,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과 그 예산·재정·인력 등을 대폭 보강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입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개별법적 근거를 확충해야 하며, 지방자치법 제15조 단서에 의한 조례제정권의 제한을 폐지하여 조례제정권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1949년의 구지방자치법에 의해 인정되었던 주민소송제도를 부활하여야 하며,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또는 그 장의 명령이나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일정 수 이상의 주민이 연서로 그 취소 등을 재판상 청구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법을 개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지방자치단체상호간의 분쟁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방자치분쟁조정제도를 개선·보완하면서 행정소송법이나 지방자치법에 자치소송특례규정을 두어 지방자치분쟁의 효율적 해결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V. 結 論
우리는 이제까지 대단히 미흡하게나마 건국이후 50여년간 공법분야에 있어 한국법제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그로부터 새 천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교훈과 과제를 도출하고자 시도하였다. 글을 맺으면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21세기 새 천년의 도전을 헤쳐나가기 위해 요구되는 새로운 법제의 패러다임은 민과관이 함께 참여하는 열린 법제, 정보화와 지식자원이 원활하게 연계활용되는 지능형 입법을 지향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새 천년의 법제는 법을 하향식 명령·통제로 일관하는 일방적인 정치적 지배와 관리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와 협동, 상향식 의사소통을 토대로 한 민주생활의 수단으로서 재정립하고 '열린 행정'과 '열린 법'을 보장하는 법제도적 기반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서울대교수·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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