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The Lincoln Lawyer) : 마이클 코넬리
- 구분법으로 읽는 영화/소설(저자 : 홍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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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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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343
미국 농담에 Lawyer Joke라는 게 있는데, 변호사를 소재로 한 농담으로, 대충 이런 식이다. ‘변호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바로 알 수 있다)’ 즉,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바로 변호사라는 농담이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변호사가 시장에 나와 생존하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다 보니, 진실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의뢰인의 등을 치고, 상대편과 야합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오히려 많이 눈에 띄어서 변호사를 소재로 한 이런 식의 농담이 인기를 끌고 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파렴치한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스릴러물인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라는 소설이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흔히 떠올리기 쉬운 ‘불의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젊은 변호사’라는 설정이 아니고, 정반대로 그야말로 ‘돈에 환장한’ 속물근성의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그리는 기발한 설정이다. 주인공인 미키 할러는 ‘정의’ ‘진실’ ‘인권’ 뭐 이런 것들은 다 웃기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마약중독자, 폭주족, 조직폭력범죄자 등등의 인간쓰레기들이라고 하더라도 두둑한 수임료만 챙겨 줄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OK인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로서의 현실적인 이해에 철저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만의 ‘돈벌이 수단’인 형사법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를 교묘하게 탈색해서 돈을 낸 의뢰인을 ‘흉악한 공권력의 마수’에서 빼내어 주면 그뿐일 뿐, 실제로 의뢰인이 무죄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개업한 지 15년, 이제는 단순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나는 괴물을 다루고 질병을 고쳐주는 전문가이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는 것뿐이다. 지키고 품어야 할 법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엔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유죄 아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본문 중에서
주인공은 역시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말처럼 ‘가장 무서운 의뢰인은 무고한 의뢰인 (There is no client as scary as an innocent man.)’ 이라는 신조를 입에 달고 산다. 진짜 결백한 의뢰인에게는 단 한 가지 해답, 즉 ‘무죄석방’이라는 답 이외에는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타협이나 양보를 통해 예상보다 낮은 형량을 받아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죄판결을 얻어내야 하고, 만일 무고한 의뢰인이 유죄로 결정된다면 변호인으로 평생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살아야한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수많은 의뢰인들을 만나서 사건을 조작(?)내지는 해결해주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단 한명의 ‘진짜 무고한’ 의뢰인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공에게 진짜 ‘결백해 보이는’ 의뢰인이 등장하여 도움을 청한다. 루이스 룰레, LA의 고급 부동산 중개인인 그가 밤에 술집에서 만난 여자의 집에 갔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는 흉기로 상처를 입은 상태이고, 그는 경찰에 상해 및 강간 미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고, 결백하다고 주장하는데, 변호사 비용을 많이 줄 수 있는 대박 고객인 그가 웬일인지 할러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할러는 생전 처음 진짜 무고한 의뢰인을 만난 것 같아 긴장하는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충격적인 실체가 드러나고, 몇 년전 자신이 맡았던 지저스 메멘데즈라는 다른 의뢰인의 사건과도 엮여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할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변호해왔던 ‘대충 나쁘기는 하지만, 그리 사회에 큰 해악이 되지는 않는’ 부류의 범죄자들과는 다른 진짜 악마(pure evil)와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실제 소설을 읽는 감상에 방해가 될 스포일러가 될 위험이 있어 생략하겠으나, 타락한 변호사가 더 타락한 범죄인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결말 부분은 정말 법정스릴러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최상급의 ‘읽는 재미’를 얻게 해준다.
작가 마이클 코넬리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나, 신문기자 출신으로 ‘해리 보쉬’ 시리즈라는 LA경찰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물을 14편이나 내는 등 미국에서는 많은 팬을 지닌 인기 작가라고 한다. 해리보쉬 시리즈의 첫 작품인 ‘Black Ice’라는 소설이 90년대 중반에 한 국내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선보인 적이 있으나,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변호사 마이크 할러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 격인 이 책이 번역되고 인기를 끌면서 여세를 몰아 다른 몇 편의 작품들도 이어서 번역 소개되고 있다.
작가 본인으로서는 전문분야에서 벗어나 외도를 한 셈인데, 극적 재미로 본다면 법정소설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존 그리샴의 어떤 소설보다도 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와 반전, 그리고 특이한 배경설정이 독자를 즐겁게 한다. 형사사건 전문변호사의 돈만 밝히는 생활을 추악하리만큼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고, 두 명의 전처(한 명은 심지어 현직 LA검사라는 설정), 마약중독자, 거리의 갱, 인터넷 사기꾼 등의 ‘훌륭한’ 고객들과 얽히면서 변호사와 범죄자 중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 의문을 갖게 하는 묘사를 이어가는 것을 보면 작가 코넬리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를 실감하게 되고, 다른 작품도 자연스레 찾아보고 싶어진다.
자 이제 칭찬은 이쯤 하고, 어쩔 수 없이 번역이야기를 해야겠다. 국내에 출간되는 번역소설의 질에 대하여는 웬만하면 보아 넘기는 편이나, 법제처에서 법문장을 다루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번역 때문에 이 훌륭한 법정스릴러의 참 맛이 1/5은 퇴색된 것 같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번역하신 번역자분은 원래 스릴러 호러 장르의 전문번역가로 유명하지만, 전문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이 책을 번역하기엔 많이 힘겨웠던 것 같다. 역자후기에도 그런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번역이 완성된 상태에서 완전히 새로 다시 번역하는 등 고생을 한 것 같지만, 아직도 많이 아쉽다.
형사절차와 민사절차에서 구분되는 ‘피고인(被告人)’과 ‘피고(被告)’의 혼동 -우리나라의 수많은 번역자들이 저지르는 ‘관행적 오류’의 영역에 속하긴 하지만- 은 여전하며, 30페이지에 가면 “피고에게는 담당 검찰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변호사와 검찰의 이해가 충돌한다면 물러나야 하는 것은 검찰쪽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에 어느 법치국가의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이 담당 검사를 선택하는 제도를 택하고 있는가? 원문은 the defendant has the right to his choice of counsel. 이다. ‘counsel’은 검사라는 뜻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변호인 (국가를 대리하면 검사, 상대방을 대리하면 변호사)이라는 의미이므로, ‘피고인은 변호인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인데,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경우이다. 법정묘사와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이러한 장르의 책을 번역할 때에는 전문성을 갖춘 번역자와 세심한 편집자의 교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소간의 번역상의 흠결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는 누구나 재미있게 미국 형사사건 변호사의 꾸미지 않은 일상을 엿보며 더운 여름밤을 식힐 수 있는 훌륭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