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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터로의 대표작 - ‘무죄추정(Presumed Innocent)’
  • 구분법으로 읽는 영화/소설(저자 : 홍승진)
  • 등록일 2010-03-11
  • 조회수 9,557
  • 담당 부서 대변인실
법제교육의 일환으로 법정영화를 정리하는 강의안을 만들던 중 존 그리샴과 함께 미국 법정소설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스콧 터로의 대표작 ‘무죄추정’을 다시 한번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황금가지출판사에서 ‘밀리언셀러 클럽’의 하나로 새롭게 출간되었더군요. 저자 스콧 터로는 그 자신이 변호사이며, 하버드 법대 1학년 재학시절을 그린 논픽션인 ‘One L’(미국 로스쿨 1학년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정속으로, 하버드 로스쿨’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습니다)로도 유명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갖게 해준 작품이 1987년에 초판이 나온 이 소설입니다. 저자 스스로가 연방검사로 활동하고, 형사사건 전문변호사로 일해 온 경력 때문인지, 법정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생동감 있고 정밀합니다. 가상의 무대인 킨들 카운티(Kindle County: 우리나라의 ‘군’정도 되는 행정구역)를 배경으로, 미모의 여검사가 무참히 살해된 사건을 주인공인 러스티 사비치 검사가 맡게 됩니다. 같은 직장 동료지만 사실은 은밀한 내연관계에 있기도 했던 상대가 살해당하고, 이러한 사실을 숨기면서 수사를 해야 하는 주인공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자신이 범인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가 나오자 당황하게 됩니다. 물론 범인은 따로 존재하지만, 수사 검사 본인이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의 전개가 생동감있게 그려집니다.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검사가 유력한 범인으로 떠오르는 설정에다가, 주인공과 피해자, 그리고 주인공의 아내와의 갈등, 주인공의 상사인 지청장 선거의 혼란, 정치적 반대파들과의 갈등, 법집행기관 내부의 부정부패,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의혹 등등이 어우러져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어지는 충격적인 반전은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예정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 소설보다는 1990년에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고, 앨런 파큘라가 감독하여 영화화된 영화 ‘무죄추정’을 더 많이 기억할 것입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의혹’ 또는 ‘해리슨 포드의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개봉 당시에 봤다가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찾아봤는데, 영화와 소설의 미묘한 차이를 짚어가며 보는 것도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예전에 영화를 볼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번에 책으로 다시 읽으면서 보니 40대에 접어든 남편인 주인공 검사와 부인,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갈등을 그려놓은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쯤에 품었음직한 인생의 신산스러움이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영화에서는 여러 주요인물들 사이의 긴장관계를 생략한 것이 많아서 책에 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범인의 심리상태를 추정해 보는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는 영화에서는 많이 생략되었는데, 책으로 보면 상당히 큰 여운을 갖게 합니다. 이 책은 법적인 지식, 특히 미국 주정부의 일선 지방검찰청에서 벌어지는 형사절차에 대하여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는 훌륭한 교재입니다. 대배심(grand jury), 배심원(jury), 기소인부절차(arraignment), motion for directed verdict of acquittal 등등 형사소송절차의 주요 내용들에 대하여 상세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다만, 번역서에 심심찮게 보이는 이상한 표현은 많이 거슬리더군요. 결국 원문을 참고하기 위하여 페이퍼백 영문본을 하나 구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킨들 군 검찰총장(Kindle County Prosecuting Attorney)’은 행정구역의 규모로 봐서 ‘킨들 군 검찰청장’ 정도로 하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1권 206쪽에는 ‘공소취소장 사본이다. ’편견없는 공소취소장‘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공소취소장을 제출한 사람은 검사다.’ 이런 문구가 나오는데, ‘편견없는 공소취소장’이란 말은 Motion to Dismiss without Prejudice를 번역한 것으로, 추후에 다시 공소를 제기하는데 제한이 없는 공소기각 청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dismissal with prejudice'라고 하면, 추후 같은 내용으로는 다시 소를 제기할 수 없는 기각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전적 의미인 ‘편견’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지요. 또, 1권 234쪽에는 ‘내가 5조항을 들어 진술을 거부한다면 물론 내게는 그러한 권리가 있긴 하지만, 신문에야 나오지 않겠지만...’ 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5조항’이란 미국 헌법 수정5조(5th Amendment)를 말하는 것으로 불이익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런 배경설명 없이 ‘5조항’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1권 268쪽에는 ‘더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는 공무집행방해죄를 추가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obstruction of justice'를 ‘공무집행방해’라고 표현했는데, 흔히 ‘사법방해죄’로 번역하는 이 유형은 우리나라의 공무집행방해보다는 범위가 넓지요. 미국에서는 형사피의자 본인이 허위의 진술을 해도 사법방해죄로 처벌받습니다. 2권 208쪽에서는 confidential communications privilege를 ‘사생활보호법’으로 옮겼는데, 이는 부부사이에 있었던 사적인 대화에 대하여 법정에서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다소 다릅니다. 이외에도 a member of law review를 법학평론 ‘발행인’으로, 주 대법원장을 위하여 clerk으로 일했다는 것을 ‘주 대법원장실에서 사무를 본 경력’이 있다고 처리한다거나, 기소인부절차(arraignment)를 그냥 ‘심문’으로 배심원 선정에 도움을 주는 consultant를 ‘정신과 의사’로 경찰이 쓰는 무전기임이 분명한 ‘radio’를 그냥 ‘라디오’로, manslaughter를 ‘과실치사’로 번역하는 등 문제가 많은 단어사용이 상당수 보였습니다. 영화로 돌아와 보면 주인공 사비치역의 해리슨 포드나 캐롤린 역의 그레타 스카치 모두 적절한 캐스팅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변호사 역의 라울 줄리아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영화 'basic instinct'의 주인공 역할을 제안받기도 했던 그레타 스카치. 요즘은 영화출연이 좀 뜸합니다. 이젠 50줄에 접어드셨죠. 다만,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라렌 리틀 판사는 소설에서의 묘사에 따르면 좀더 잘생긴 흑인배우가 맡았어야 할 것 같군요. 결론적으로 잘 짜여진 법정영화-소설로 매우 흥미롭게 보았던 수작입니다만, 인간의 본색에 숨어있는 앙금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줘서, 읽고 나면 좀 먹먹하게 만드는 힘을 갖추고 있어서 그런지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 주변을 맴도는군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가 실감날 만큼 나이가 먹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 3. 1)